하자 3 - 건망증
은행에서 근무하면 장점이 있습니다.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기준에서 가장 큰 것은 상품 가입에 있습니다.
좋은 상품을 가릴 수 있는 눈이 길러진다는 점인데
한 번씩 정말 좋은 상품을 만나면 지점 직원들 전부 가입하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치매 보험’이었습니다.
10년을 납입하고, 15년이 지나면 원금을 100% 돌려주는 환급형 상품이었죠.
단, 중도 해지 시 환급금이 0원이라는 무시무시한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가입할 때만 해도 동료들과
'납입하는 10년 동안 절대 퇴사하지 말자'며 비장하게 다짐했는데,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저는 먼저 은행 문을 나섰습니다.
그래도 그날의 다짐이 아까워(실은 해지 환급금이...ㅠ) 지금까지 꾸준히 납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흔을 넘기니 슬슬 보험 가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
'어... 저기 그 머꼬, 있다 아이가'가 일상 용어가 되었거든요.
분명 처음에는 적금 목적 80%, 혹시나 하는 마음 20% 였는데
뭔가 전세가 역전되는 느낌도 있고 말이지요.
이 정도면 진짜 보험금 타먹을 날이 머지않은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날은 유독 수영장에 가기 싫은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승리의 심벌, 락커 키를 손에 쥐었죠.
샤워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뿌듯했습니다. 이겼으니까요.
수증기 가득한 샤워실에서 빈자리를 찾아냈을 때의 그 쾌감!
앗싸.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열었는데... 아뿔싸.
없었습니다.
수영복도
수모도
수경도.
샤워 도구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이름 잃은 수영 가방을 들고
신나게 달려온 나 자신을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하고 웃겼습니다.
바보인가.
안쓰러이 바라보는 같은 반 동료를 보며
“하하하하하, 저 오늘 샤워하러 왔어요. 즐겁게 수영하세요.”
버블버블 거품 가득 내서 머리를 감으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 씻겨 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좋은 기억은 남고 나쁜 기억들만 싹 씻겨 나가면 좋겠다.
내일은 수영복을 챙겼는지 세 번 확인하고 집을 나설 겁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죠.
오리발을 빼먹고 안 챙길지도요.
혹은 따뜻한 옆 커피숍으로 새어버릴지도요.
뭐,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그럴 때 쓰라고 들어둔 보험이 있는데.
라고 쿨하게 말해보지만 절대 타먹을 일이 없으면 좋겠으니(ㅠ_ㅠ)
일단 머리에 좋은 블루베리와 호두를 탈탈 털어먹고
좋아하는 스도쿠 게임 실컷 해봐야겠습니다.
내 기억력도 중도 해지 없이 만기까지 꽉 채워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게 인생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길 아닐까요?
'원금 100% 환급'의 기쁨을 누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혹시나 수영복을 빠뜨려도 제 발로 가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바라며.
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네요.
"증신 챙기라 증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