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1- 공포
당신은 무서운 것이 있으신가요?
저 멀리서 형체가 보일 때 무의식에서부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그런 느낌.
가까이 다가오면 으아아아 소리 지르며 도망가기 바쁜.
누군가는 귀신을 말할 테고
누군가는 한 밤중에 마주친 사람,
또 누군가는 뾰족한 물체에서도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동물 공포증이 있습니다.
키 168cm의 덩치 큰 아줌마가 조막만 한 작은 개,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니. 참 어울리지 않지요?
물론 보는 것은 정말 좋아합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면 아주 평화롭습니다.
고 깜찍한 얼굴로 애교 부리는 모습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러나 실물이 등장하여 옆을 지난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무릎의 반도 안 되는 강아지가 옆을 지날 때 '쿵'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습니다.
(귀여워서 심쿵사라는 말은 영 해당사항이 없나 봅니다.)
인간에게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어 뵈는 고양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는 동네 고양이들이 다 모인듯한데
그들 사이에 살기 좋은 아파트라고 소문이라도 난 모양입니다. (평점 ★★★★★)
무섭기로는 또 조류를 따라올만한 것이 없지요.
중학교 생물 교과서에 등장한 흑백의 수탉을 차마 볼 수도 찢어버릴 수도 없어
고이 접어 그 페이지는 펼치지도 못하고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 눈이, 부리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저를 막 쪼아버릴 것만 같더군요.
이쯤 되니 전생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하네요.
공덕을 엄청나게 쌓은 지렁이가 사람으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요?
몇 년 전, 이런 저의 공포를 마주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작은 강아지가 왕! 하고 용맹하게 튀어나왔습니다.
목줄을 하고 있었지만 길었던 탓에 우리 집 현관문 앞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려버렸지요.
저만큼이나 당황한 주인은 목줄을 짧게 잡는다던지 강아지를 안을 생각은 못하고
"먼저 내려가세요."만 반복했습니다.
어떠한 천재지변에서도 출근이 먼저인 K-직장인은
그들을 우리 집 앞에 내버려 두고 혼자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왜인지 모를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망쳤다는 느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예민함이 극에 달해,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행동을 하고 말았지요.
1층에서 다시 만난 그 주인에게 차창을 내리고 쏘아붙였습니다.
"다음부터는 목줄을 짧게 잡던가 안고 타주세요. 아침부터 이게 뭐예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도 몰랐을 텐데. 하필 내가 개를 무서워한다는 걸. 강아지가 튀어나갈지도, 우렁차게 짖을지도 몰랐을 텐데.'
수십 번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네. 저 소심이에요......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에 작은 간식 꾸러미와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호입니다.
아침에 많이 놀라셨죠?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사과도 못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늘 엘리베이터를 타실 때 긴장하는 마음으로 타시지 않도록
강아지를 잘 안거나 줄을 당겨 구석에 자리할게요. 죄송합니다.
하루 종일 품었던 미안한 마음이 이분에게도 있었나 봅니다.
저만큼이나 소심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서둘러 펜과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퇴근하고 쪽지를 발견하고서 놀랐네요.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견주분도 엄청 당황하셨을 텐데
이렇게 쪽지까지 써서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아지를 보면 예쁘고 좋은데 공포심이 너무 커서
저도 아침에 좀 예민하게 군 것 같아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네요.
강아지와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_^
우리 집보다 세 층 위의 그 집 현관문에 조심스럽게 종이를 붙이고 아이들 간식을 걸어놓고 살금살금 걸어 내려왔습니다.
애견 인구가 455만에 육박하는 요즘, 사실 '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등산하러 갔다가 그만 강아지의 따끈한 흔적을 밟아버렸습니다...... 아아......)
하지만 저만의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강아지를 만나면
1. 일단 쿠션어를 깔고
2. 제 상황을 설명하고
3. 견주분이 행동을 해주시면
4. 모두가 기분 좋은(^^) 상황이 됩니다.
"안녕하세요. 강아지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제가 개 공포증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강아지를 좀 안아주시겠어요?"
굳이 약점을 감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겁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다른 이들은 벌레를 무서워하지만 저는 또 벌레는 잘 잡거든요.
그래서 저는 계속 말해보려 합니다.
“제가 좀 무서워서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다 언젠가
누군가의 개가 제 첫 번째 '멍멍이 친구'가 될 날도 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해 봅니다.
내일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혹시라도 마주칠지 모르는 귀여운 생명체들에게 말하고 싶네요.
“안녕 귀염둥이씨, 괜찮으시다면...... 오늘도 저를 살려주시겠어요?” (오들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