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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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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l 0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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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꿉꿉 축축 비

일러스트 : 비 오는 달팽이가족 by 최집사



엄마는 화장을 잘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침이면 엄마에게 머리 좀 빗으라고 타박을 줬다. 그 시절엔 아이 둘 키우는데 집에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남자는 그런 말을 꺼내도 목숨이 위태롭지 않았다. 엄마는 밥을 치우다 말고 싱크대에 서서 뭘 그렇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물도 챙기고 부족한 반찬도 챙기느라 안 그래도 느리게 먹는 사람이 허기를 다 채우지 못한 것이었다. 오늘 아침 산발된 머리로 양파를 까다 말고 밥을 먹는 나를 보고 그 기억이 소환되었다. 이제서야 싱크대 취식은 베테랑 아줌마의 미장센이라는 걸 알았다.



명품백 들고 비싼 밥 사 먹는 사람만 예쁘다 말하는 세상은 별로인 거 같다. 장날에 나와 도시락을 까먹는 할머니나, 공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인부, 손수 무친 나물들로 밥을 비벼 먹는 아줌마도 아름답다 생각하는 세상이면 좋겠다. 이중섭 같은 화가들이 그 모습들을 그려줬으면 좋겠다. 요시고 같은 작가들이 사진으로 담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작품들이 세상에서 꽤 비싸게 팔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제법자라 이제는 묶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양은 미비해서 묶어 놓고 보면 세필붓처럼 볼품없지만, 동시에 영구적인 곱슬머리가 된 건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유독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뻗치고 고불거린다. 신께서 참 했던 머리숱을 가져가시고 말 안 듣는 웨이브를 주신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릴 적 아빠 말이 떠올라 빗어 보기도 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머리카락이라도 자유로워진 거라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머리를 빗는 동안 중년이 된 내 모습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음이 신의 큰그림인지도...



풍족한 채소를 버리지 않고 잘 소진을 위해 삼시세끼 부지런히 챙겨 먹고 있다. 코끼리가 육중한 이유를 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꼴이다. 그 덕에 몸무게도 늘고 화장실도 가는 횟수도 늘었다. 어찌 보면 유산균 캡슐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효과를 보고 있다. 어디선가 섬유질이 풍부한 코끼리똥으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내 것으론 안 되겠지…? 지구에서 유해한 건 인간들 뿐이지 않을까 싶다.



도서관에서 예약 도서가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빌려온 책을 연장하지 않아 연체 중인 상태였다. 꽤 오래 기다렸던 책이라 서둘러 반납하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비가 온다고 알려주셨다. 잠시 주춤했지만 의지를 다잡고 도서관으로 갔다. 우비를 입고 비닐로 바구니 속 책들을 덮고서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머리에 꽃은 꽂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속으론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비를 맞으니 묘한 흥분이 밀려왔다. 이렇게 가끔 자발적으로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반려인 카드 찬스로 책을 빌리고 도서관 1층에서 진행 중인 엄유정 작가님의 그림책 삽화전을 구경했다.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요즘 한창 떠올리는 겨울 나라의 그림이었다. 놀랍고 반가운 한편 현실에서도 알고리즘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이리 눈앞에 자꾸 아른 거리는 거 보니 언젠가 그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조용히 비행기표를 검색해 보았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86zZYCPI-4/?igsh=MTB0NHV1ZHd2Znhs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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