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2018 벨기에 왕립미술관 후기]
처음 미술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면, 난해하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멋있게 감상하고 싶은데, 대체 뭘 그렸는지도 모르겠고, 화가가 말하려는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희대의 역작이라며 감탄하지요. 그 점이 미술감상에 대한 장벽이 되어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뭔가, 나만 모르나 싶고 미술감상은 너무 고차원적인 영역인 것 같아 주저하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미술 그 자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림이 담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통상적으로 한 개의 작품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철학과 역사적 배경을 함축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역사나 철학을 두루 알아야 좋은 감상을 할 수 있지요. 마치 외국어 같달까요? 하룻밤 당일치기로 알기 어렵고 긴 시간 사색하고 공부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미술 관람은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좋은 도구이자, 늘 공부하고 노력할 수 있게 자극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취미입니다. 솔직히 피곤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실제로 이 작품을 봤었을 때 무척 신기했습니다. <마라의 죽음>은 어느 미술사 책에서도 빠진 적이 없을 만큼 유명한 작품인데, 한쪽 벽면에 덩그러니 걸린 게 묘하게 다가왔지요. 이처럼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마라의 죽음>을 보고 느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냥 “사람이 편지를 쓰다 잠들었나 봐요”, 좀 더 자세히 본 친구는 “저 사람이 죽었나 봐요” 정도로 말할 겁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마라의 죽음>은 그저 하나의 살인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이니까요. 미술 양식 측면에서도 특별한 기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 작품이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미술작품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는 미술사 통틀어 가장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누린 인물일 겁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다비드의 삶을 영화화한다면 한 편의 대서사시가 될 것 같아요. 프랑스의 대격동기에 활동하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는 등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지요. 혹자는 처세술의 달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유복한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엄격한 기숙학교를 다니게 되었지요. 이후, 외삼촌이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궁전 수석 화가였던 프랑수아 부셰에게 보냈고 최고의 미술학교였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됩니다. 입학 후, 약 8년간 수학하면서 당시 최고의 영예인 로마대상까지 받게 되지요.
이듬해, 다비드는 로마를 5년 동안 여행하며 고전회화와 조각을 본인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게 되면서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본인만의 화풍을 정립하게 됩니다. 입문은 로코코였지만 그랜드 투어를 통해 신고전주의로 꽃을 피운 겁니다. 장난스러운 로코코 양식이 아닌, 단순한 구도지만 다채로운 색감으로 그림 자체를 무게감 있게 그려내지요.
이것을 미술사 관점에서 보자면, 로코코와 그랜드 투어로 높아진 로마/그리스 시대에 대한 관심은 미술의 방향성도 점차 인문학 영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과거에 왕족 또는 특수계급에만 향유되던 고급문화도 교육의 발달로 인해 점차 평민 영역으로 저변 확대되지요. 놀고먹는 것 이상으로 지식을 뽐내는 게 중요하던 시대였던 겁니다. "나는 이런 것도 갖고 있다" 였다면, 이제는 "나는 이런 것도 알고 있다" 랄까요?
거기에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철학적 사유까지 녹아들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며 순결한 미술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신고전주의는 로코코 운동의 향략주의와 경박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했고 그 대표작들을 보면, 뭔가 비장하고 결연하지요. 로코코 시대의 여신들은 뭔가 에로틱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주력하지만 신고전주의자들은 주로 문학과 역사에서 영감을 얻었고 남성답고 영웅의 서사시를 그렸습니다. 어떤가요? 정확히 자크루이 다비드의 성장과 일치하지 않나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초기 대표작 중에 하나입니다. 궁정화가였지만,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불만이 많았던 다비드는 혁명당원이 됩니다. 어쩌면 친구였던 로베스 피에르의 영향일지도 모르지요. 기득권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치성향으로 바뀐 그가 그린 작품은 정치적 의도가 명확히 드러냅니다. 먼저, 구도를 보면 칼을 들고 남자들은 용맹한 자세를 취하는 반면, 옆에 위치한 여인들은 슬피 울고 있습니다. 그냥 뭔가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비장하게 잘 그렸네... 하는 수준일 거예요. 하지만,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은 꽤 복잡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간에 결투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딸 중 하나가 호라티우스 형제들 중 하나와 결혼했고,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은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아들과 약혼을 했지요. 내 남편이 살자니, 내 남자 형제가 죽는 격이요, 내 형제가 살면 내 남편이 죽는 상황인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 가문의 웃어른들은 결투에 참전하도록 촉구했고 비탄에 빠진 누이들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복종했습니다. 그림의 배경을 알고 보면 좀 달리 보이지요?
비극적인 내용임에도 신고전주의 시대 작품답게 영웅의 서사시를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그리스 영웅의 이야기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왜 하필, 왕정시대에 혜택을 받던 자크루이 다비드가 많고 많은 주제 가운데 이것을 그렸을까요? 그림의 구성을 자세히 보면, 우는 여인들의 모습보다 남자들의 용맹함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즉, 정치적 이상(형제들의 다짐)은 개인적인 동기(여인들의 슬픔) 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 겁니다.
다비드는 그림을 통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로 혼란하던 시대의 관람자들에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보여주며 시대 개혁에 동참하라는 선동을 이끌어 냅니다. 당연히,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요. 이 작품이 1785년에 그려졌고, 프랑스혁명이 1789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히 이룹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유구한 미술사 가운데, 정확히 의도된 정치적 목적을 갖게 된 시점을 신고전주의 시대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뭐랄까... 당시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을 이용했다면, 신고전시대부터는 선동의 도구로서 미술을 활용했달까요? 사진이나 영상이 없던 당시에 그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 시대야 워낙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여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지만, 과거에는 오직 그림뿐이었죠.
혁명당원이던 자크루이 다비드는 로마에서 돌아온 그는 무능한 왕정에 지친 시민들의 분노를 정확히 캐치하였고 프랑스 왕가가 선호하던 로코코 양식에 완전히 반대되는 양식으로 그립니다. 로코코 양식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음에도 그림에는 특유의 장난기나 가벼움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요.
프랑스혁명으로 승승장구하던 다비드였지만, 왕정 이후의 국민공회 내에서 평민의 기본권을 주장하는 자코뱅파와 경제적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롱드파가 부딪히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급진 좌파와 온건 우파의 싸움이었습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림의 주인공인 장 폴 마라와 함께 자코뱅파였습니다. 자코뱅파는 그 유명한 공포정치를 이끈 로베스 피에르가 이끌었지요. 당연히 지롱드파 일원들이 무수히 죽습니다. 이에 지롱드파 일원이던 샤를로테 코르데가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 마라를 암살하게 되지요. 이게 바로 <마라의 죽음> 탄생 배경입니다.
다비드는 이 사건을 그림으로 남겨, '혁명의 투지'를 더욱 크게 불타오르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림으로서 <마라의 죽음>은 마치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샤를로테 코르데도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코뱅파의 공포정치는 프랑스혁명으로 힘들게 이룩한 공화정을 도리어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더욱 도탄에 빠지게 만들 거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이후의 역사는 그녀의 믿음대로 흘러갔다는 점에서 역사학자들은 샤를로테 코르데를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점이 바로 정치의 영역에서의 미술이 갖는 영향력이라고 생각해요. <마라의 죽음>을 보면 그의 죽음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많은 미술사책에서도 그렇게 표현되지요.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진실을 가릴 수도 있고 더 도드라져 보일 수 있습니다. 다비드는 미술의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이점을 십분 활용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극에 달하면 기우는 법입니다. 공포정치에 신음하던 시민들이 로베스 피에르에 대항하여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자코뱅파가 무너지고 자크루이 다비드는 위폐 됩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죠. 오히려 살아난 게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뛰어난 미술가였기에 가능했겠지요. 그의 중년은 유럽 각지에서 오는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약 10여 년이 지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리면서 피로 얼룩진 프랑스 역사에 화해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뜻깊지요.
그렇게 살아가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뛰어난 그림실력을 눈여겨보던 나폴레옹이 었지요. 당시, 좌익 혁명주의자가 제국의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변화한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다비드에게 있어 왕정, 혁명정부, 제국까지의 프랑스 격동기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참 흔치 않은 경우기는 합니다. 이번에는 정치적 공직은 맡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 실력이 어디 가나요? 최고의 권력자 옆에서 본인의 실력을 유감없이 나타냅니다.
<황제 대관식> 그림을 보면 교황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황제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지요. 또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보면 존경심마저 우러납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의 모습 같지 않나요? 덕분에 자크루이 다비드는 다시 한번 궁중 수석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됩니다. 어쩌면 이때가 자코뱅파 때 보다 더 권력의 중심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정권을 잃자 다시 위기에 빠지게 되고 다비드는 벨기에에 망명하여 생을 마치게 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열렬한 진보주의자였고 평생토록 그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으로도 옮겼지요. 저는 그의 삶에 대해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 밖에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진보가 좋은가 보수가 좋은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는 우리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보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술 한잔 걸치고 친구들과 정치적 성향을 묻는 질문으로 너는 어느 당을 지지하느냐? 리고 대뜸 묻기도 합니다. 어느 당이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할 수 있지만 진보냐 보수냐를 정확히 알고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프랑스 대혁명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영국의 정치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대답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보수란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던 전통에 이유가 있고 경험론에 기반하여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 진보의 가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라 했지요. 여기에 좋고 나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점은 어느 가치관에 입각하여 의사결정을 내리느냐입니다.
우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견해와 욕구는 다양하고 무한하지만, 그것을 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둘지 정해야 하고, 다수결에 의해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하는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경쟁, 갈등, 협력을 수행하는 자가 바로 정치인이지요.
정치는 자고로,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규칙을 만드는 활동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정치의 특성을 체계화하고 선택한 시스템이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민주정치는 의회정치며, 의회정치는 정당정치고, 정당정치는 곧 책임정치입니다. 유한한 자원에 대하여 본인에게 유리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적인 참여를 하고, 그 참여를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을 선택하며, 그 정당이 책임을 다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 생각해요. 따라서 책임을 지지 않는 정당은 민주사회에서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누구나 정치적 노선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사회에 내딛는 젊은 청년들은 본인들에게 유리하도록 변화를 희망할 것이고, 기성사회에 적응한 중장년층은 지금의 상태가 유지되길 바랄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고 정치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참여”는 필수입니다. 국가 법질서에 가장 무서운 것은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은 결국 정치인의 방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정치적 책무를 맡은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따라 의사 결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곤궁해집니다. 프랑스혁명 전 가난했던 국민들처럼 말입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는 격동의 시대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다비드의 수많은 명화 중에 <마라의 죽음>이 신고전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 참여 의지”를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념을 선택하던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중요한 사실은 “참여”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가 참여하여 선택한 정치인들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까요?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투표를 잘하는 것입니다. 투표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약속과 실천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그리고, 항상 그들을 감시하며 지켜보면 되는 것이지요. 정치라는 것이 엄청나게 거창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더 어려운 것은 갖은 유언비어와 여론의 호도 속에서 내 스스로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게 힘들지요.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다음으로 수많은 공약과 정당들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을 찾으면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충분히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바른 철학을 가진 정치인도 많았으면 합니다. 개인의 이익보다 본인을 지지하는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요. 또한 정치기사를 항상 꼼꼼히 보는 젊은이도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짜증나고, 재미없다고 치부하기에 우리의 미래와 삶은 너무 소중합니다.
간디는 7가지 악덕 중에 하나로 “철학 없는 정치”를 말했습니다. 철학이 없다는 것은 정치인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뜻 입니다. 당연히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겠지요.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합니다. 3%의 바른 생각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고, 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우리의 관심에서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도 모두의 소중한 관심들이 모여, 바다 같이 넓은 이 세상이 정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고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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