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 프리드리히 <겨울풍경>
아직은 추운 겨울입니다. 겨울날의 모습은 조용하고 신비롭고 때로는 쓸쓸하지요. 늦은 밤 골목길을 걸으며 주황빛 가로등에 스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 그동안 어지러이 흩날리던 생각의 파편들도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아마도 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인가 봐요.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기도와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 그동안 걸쳤던 얼마쯤의 허세와 위선의 탈을 벗어버리고 내 마음과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얀 풍경이 보입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요즘 같은 계절에 낭만파 거장의 그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태어난 독일의 풍경을 거룩하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화풍으로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풍경화에 배어있는 신비주의적이고 멜랑콜리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보통의 풍경화와는 확연히 다르지요. 고독하면서 우아 하달 까요?
그림 속 풍경은 광활한 겨울 들판 뒤로 거대한 성당이 저 멀리 있고, 그 앞에 소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보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몸이 불편한 사내가 목발을 버려둔 채 바위에 몸을 기대어 있습니다. 드넓은 눈 속에서 하얗게 얼어있는 것 같지요. 남자는 바위에 기댄 채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풍경 속에 아주 작게 위치한 사내의 모습은 미미하기 그지없습니다. 막막한 이 상황에서 대체 그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림 속 풍경은 제목처럼 하얀 겨울입니다. 황량하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밭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에 굳이 겪지 말았어야 할 일을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패, 목표에 대한 좌절, 불의의 사고 등... 혹자는 “평탄한 길만 가는 그 인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삶에서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친다”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인생에서 곤란한 순간.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막장의 시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때,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래서 진실된 기도의 순간은 가장 깊이 내려앉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인생의 겨울을 보내본 적 있습니까? 모든 게 얼어버린 추운 겨울은 곧 죽음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춥고 시린 계절. 뼛속을 사무치는 바람에 눈물조차 얼어버리는 시간이지요. 송곳 같은 바람이 빨갛게 얼어버린 귓불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차가운 한기에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의지하던 목발 조차 이제는 거추장스러워집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때를 만나면 누군가를 만날수록 오해가 풀리기보다는 오해만 더 쌓이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쓸쓸하게 서성이다가 보면 외롭고 지쳐서 홀로 주저 않아버리는 순간도 오지요. 기댈 곳은 없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가 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죽음조차 무섭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단 인생뿐만 아닙니다. 선과 악,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모든 대립적인 것 들은 결국 새끼줄처럼 꼬여 하나의 줄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악 없는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여자 없이는 남자도 없잖아요? 아래가 있어야 위도 존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아십니까? 독배를 마셔야 하는 그날,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발목을 묶어두던 사슬이 풀립니다. 발목을 옥죄던 사슬이 풀리는 순간은 곧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슬이 풀려 시원해진 발목을 어루만지면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쾌락이란 이상한 거야. 고통과 대립하는 것일 텐데,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쾌감이 생기는구먼"
독배를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또다시 말을 건 냅니다.“잠자는 것이 깨어있는 것의 반대인 것처럼 살아있음의 반대는 무엇일까?"
"죽음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의 답을 몰랐을까요? 독배 앞의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삶 또한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 아니겠냐고 되묻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절망 속에서 희망이 싹트고, 끝이 난 후에야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생과 사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기대어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 입니다.
어둠을 모르고 빛을 알 수 없습니다. 지옥을 거치지 않고서는 천국에 닿을 수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연설에서 '죽음이야 말로 삶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죽음 앞에서는 오직 진실된 것만 남는 법이지요. 그래서 그는 독배 앞에서도 고귀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나 봅니다.
슬픔 뒤에 기쁨이 있고, 막장의 순간에서야 다시 솟아오를 힘이 생깁니다. 차디찬 바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얼어버릴 듯한 추운 겨울이지만, 이 시절이 끝나면 꽃이 피고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봄날이 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날이 오기까지 견디어 내기가 힘들 뿐이지요. 그렇다면, 차가운 시간 속에서 봄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요?
프리드리히는 <겨울풍경> 속의 노인의 모습을 통해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은 기도뿐 입니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주니까요. 죽음과 절망의 시간, 끝도 없이 파 내려간 막장의 공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가장 깊은 바닥에서 소망을 읊조리다 보면 그것이 곧 힘이 되지요.
어쩌면 진정한 기도의 힘은 나 스스로 돌이켜보고 자기 뿌리를 돌보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둠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눈물의 참회 뒤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도 가지게 됩니다. 눈부신 어둠이지요. 당나라의 시성 백거이는 험난하기로 유명한 태행산을 인생길에 비유하며 시를 하나 남겼습니다.
험한 태행산길에 수레바퀴가 꺾어져도
그 길, 사람 마음보다는 평탄하다네.
거센 물결이 배를 뒤집어도
사람 마음보다는 잔잔하다네.
우리 인생길 험난한 것은
물길에 있지 않고 산길이 있지 않고
오로지 사람 마음 안에 있네.
프리드리히의 <겨울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면 춥고 황량한 풍경이지만 따뜻한 온기 또한 느껴지지 않습니까? 언제나 외롭지만은 않습니다. 비록 사내 곁에는 아무도 없지만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와 저 멀리 웅장하게 솟은 첩 탑의 십자가가 따뜻한 기운을 머금은 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지요.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결코 주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가 고통에서 신음할 때도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늦추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신의 손길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뿐이지요. 언제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보셨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나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바라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기 겨울풍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