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브리옹 Jan 20. 2022

[19C, 프랑스 사실주의] 변화의 시작점

밀레 <씨 뿌리는 사람>

  

밀레 <씨뿌리는 사람>


  예전에 밀레전을 다녀왔었던 기억이 납니다. 수수하고 편안한 바르비종 파의 정수를 볼 수 있어서 여유로운 기분마저 느꼈지요. 최근에 바쁘다는 핑계로 글쓰기가 뜸해졌습니다. 몸이 바빠지면 마음이 바빠지고,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보고 느끼기가 쉽지 않아요. 마음으로 느낀다는 건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한다는 점에서 잠시 뒤를 돌아볼 시간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들도 많지만 가슴으로 이해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그렇지요. 굳이 밀레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작품을 찬찬히 바라보면 화가의 의도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본다라기 보다 읽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 것 같네요. 온전히 느낀다는 것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해를 했다는 것은 기존 지식과 나의 가치관까지 동반하기에 특별한 경험이지요. 그런 점에서 밀레의 작품들은 복잡한 미술개념을 접어두고, 작품만으로도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밀레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실주의 대표 화가입니다. 그는 바르비종 화파의 창립회원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담았지요. 단순한 주제를 선택하고 꼼꼼한 묘사를 통해 자연주의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건 아닙니다. 초기 활동하던 시대는 낭만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극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었지요. 밀레도 파리 살롱전에 입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낭만주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지요.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요?



  당대 모든 천재 화가들이 화려하게 그려내는 낭만주의 시대에서 그는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요한 콩쿨에서 번번이 낙선하지요. 마침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했고,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처럼 바르비종 숲으로 들어갑니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성공은 하지 못하고, 파리를 떠나 시골길로 갈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좌절감도 맛봤을 것이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겁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넓게 펼쳐진 밭과 칙칙한 시골사람들... 화려했던 파리와 비교하면 특별한 영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을 겁니다. 뜨는 해와 지는 해... 일 년 내내 농부들의 곤궁한 삶들만이 눈에 들어왔겠지요.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스쳐 지나갔을 모습들이 마음에 닿기 시작합니다. 자연 풍경을 넘어서는… 대지에 순응하는 삶의 거룩함을 발견한 거지요. 분명, 밀레에게는 낭만주의만의 극적인 화풍보다 바르비종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온화한 감정들이 더 값지고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는 시작되지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뜻을 품게 됩니다. 그것을 입지(立志)라고도 합니다. 긴 사유의 끝에 내린 결론은 곧 가치관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밀레 역시도 그림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생겼겠지요. 기득권층은 그를 외면했고, 당시의 화가들도 주류를 벗어난 그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의 길을 걸어갑니다.



   살다 보면, 남이 한 일을 이해할 수 없고, 가끔 내가 한 일도 이해 못 할 때도 있습니다. 보통 전자는 정보가 부족한 경우가 많고, 후자는 욕심이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냥 괴짜들일까요? 통상 이런 사람들을 고생을 사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모하고 손해가 눈에 훤한 그 길을 걷는 그들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요. 도전이라고 하기엔 성취하는 바가 크지 않아 보입니다. 솔직히, 누구나 편하고 익숙한 걸 선호합니다. 늘 그렇듯 지금 하는 일만 하면 그만이지요. 그러므로 지탄받을 일도 없습니다. 어쩌면 긴 시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일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인 것 같아요.



   남들이 기피하는 일. 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한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소중한 자산이 되지요. 솔직히, 과거의 나는 스스로 환경을 바꾸기 보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게 후회되지는 않아요. 밀레도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처럼 말이죠. 오히려,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또 묵묵히 나아가는 게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긴긴 인생 동안 늘 같을 수많은 없고, 또 그렇게 가만두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궁핍함 속에서도 묵묵히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 비주류일지라도 그 모습을 그것을 온전히 담아낸 밀레의 모습이... 가장 먼저 읽히고 또 이해된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레는 정치적인 오해를 받든 지 말든지, 그의 철학대로 바르비종 특유의 사실적인 풍경을 그려냅니다. 혹독한 비평도 있었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 그토록 원하던 살롱전의 대상을 차지합니다. 낭만주의 화풍이 아닌 자연주의 화풍으로 말이죠. 밀레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좀 더 새로운 것을 찾았고 남들이 주저하는 그곳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결국 그 씨앗은 인상주의에 뿌리내렸고, 상징주의라는 줄기를 거쳐 모더니즘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에 적응되기까지 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게 자의(自意)일수도 타의(他意)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변화의 시점에는 순응과 감사함이 있다는 겁니다.



  경건한 농부의 손길, 땀의 가치, 빈곤보다 넉넉한 마음...



<만종>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만종> 입니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실제로 보면, 그 명성에 비교해 아담하고 소박합니다. 그러나, 작품에 담긴 고즈넉한 분위기와 엄숙함은 오르셰 미술관에서도 손꼽힐 만큼 훌륭하지요. 만종은 삼종기도 중 저녁에 울리는 종소리를 의미하는데, 삼종기도는 가톨릭에서 전통적으로 세 번 암송하던 기도문을 뜻합니다.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의 천사가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에 대한 감사지요. 저기 있는 농부 부부 역시 고단했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작은 소득에 대한 기쁨과 하느님에 대한기도가 경건하게 느껴집니다.



  분명히, 밀레도 바르바종에서 감사함을 느꼈을 겁니다. 치열했던 파리의 생활을 벗어나, 자연에 순응한 삶에 대한 감동을요. 감사는 주는 것이고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기쁨은 나로 인함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지요. 따라서 감사는 모든 이에게 사랑으로 다시 돌려주는 겁니다. 그게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간에 말이지요. 그럼 감사함의 마음으로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과거의 밀레는 불만이 가득했었을 겁니다. 바라는 것들 역시 응당 받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신이라면 꼭 응답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들. 하지만,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능히 이루어져야 할 그 소망들에 대해 응답이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더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소원들은 이미 충분히 받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함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돌려주는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불만과 아쉬움으오 점철되는 삶을 만족과 감사로 돌아서던 순간이 말입니다.



건강한 육체. 평안한 가족. 좋은 친구. 노동의 보람.



  99가지를 가졌으면서, 남은 1가지 때문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은 망각한 채, 몇 가지 아쉬운 것들을 불평하며 산다는 게 너무나 미련한 짓이란 걸 알게 되지요.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좋은 생각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성장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거기를 다니기에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입니다. 만약, 내가 일하거나 공부할 책상조차 없다면 얼마나 비참할까요. 건강을 잃고 어느 병상에 누워있다면 그때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내가 노력한 것보다 나는 더 많은 기쁨과 복을 누리고 살았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만족과 감사가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노력했던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받았고, 분에 넘치는 성취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의 끝을 모르는 마음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노자는 말합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고, 탐욕으로 인해 생기는 허물이 가장 크다”



  해 질 녘 삼종기도를 드리는 농부 부부의 모습 속에서 고단한 삶 가운데 자리 잡은 깊고 충만한 기쁨이 느껴집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고했던 것처럼, 저 겸손한 부부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네게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할 지니!!!”



  멈출 때를 안다는 것. 그리고, 끈질기게 애착하던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변화의 시작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C, 프랑스 사실주의]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