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윌리스 <돌 깨는 사람>
여행지에서 우리는 종종 똑같은 자세로 여러번 사진을 찍습니다. 정말 미세한 표정 변화 뿐일텐데, 어떤 사진은 마음에 들고 또 어떤 사진은 마음에 들지 않지요? 모두가 비슷한데, 흡족한 사진을 건질 때까지 수십장을 찍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중 잘 나온 사진을 고르고 특수효과 까지 넣어서 가장 아름답고 예쁜 모습으로 가공합니다. 그럼, 그 프로필 사진은 순수한 의미로써 사진일까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사진조차 조금씩 미화하기 마련인데, 현실 그대로 미화없이 표현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 입니다. 솔직히 말해, 현실 그 자체가 낭만적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름살과 어색한 표정이 늘지만 그게 나라고 받아들이기에 선뜻 내키지 않지요. 슬픈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 미화해서 바라보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도 같아요.
헨리 월리스는 우리에게 생소할지 모르나, 19세기의 극빈자와 노동자들의 현실을 사실대로 그려낸 화가 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극심한 인간성의 폐해를 낳기도 했지요. 솔직히 노동이라는 단어는 뭔가 투쟁적이고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지 않나요? 뭔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그려낸 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먼저 위의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육체 노동자가 일에 부쳐 잠시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쓸쓸한 낙엽과 진한 고동색이 힘들고 고된 노동의 흔적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잠들어 있다고 보기에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그의 다리와 표정.
그는 일하다 죽어 버렸습니다.
윌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강제 수용했던 ‘1834년 빈민구제법’의 결과를 비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립니다. 당시의 일부 노동자들은 구빈원에서 빠져 나오려고 심하게 일을 하다 죽기까지 했던 사건을 상기하고자했던 것 이지요.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삼청교육대나 형제복지원 같은 것들 이지요. 이 그림을 받치고 있는 액자에는 인상적인 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길었던 하루의 일이 끝났다”
우리도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나름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죠. 이게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입버릇처럼, “살기 위해 사는 건지, 죽지 못해 사는 건지” 자조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묻지마라 갑자생'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924년생 어르신으로 이제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일제시대, 6.25 전쟁, 산업화, 민주화, IMF까지 모두 겪으신 이 분들의 아픔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주차단속이나 하시는 그냥 그런 분들이지요. 어린 시절 경비실 갑자생 경비실 아저씨를 보면 반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끼니를 드시겠다고, 물을 끓어 맨밥을 말아 드시던 그 주름진 모습이 생생합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운 날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굴곡지고 한 많은 인생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현실은 희극이 아닙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치는 노동자들이 거리에 있고,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게 있었던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희망이 끈을 놓아버리고 절망의 끈에 목을 메신 분들도 보았습니다. 당장 엄청난 폭우에 방 한칸 없이 떠도는 수재민도 있습니다. 반대로 비트코인이나 부동산에 투자해 큰 돈을 벌어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당한 경제활동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다만…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철학의 부재가 아쉬울 뿐 입니다. 도덕 없는 경제가 익숙해져 가는 것이죠.
요즘 세상에서 경제 논리를 말하면서 도덕까지 논하기는 힘듭니다. 돈과 명예를 쌓기 위해 스펙을 쌓고, ‘강한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다’ 라고 외치는…이 무한한 배틀로얄에서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무한 경쟁체제 속에서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세상은 승자와 패자로 나뉠 수 밖에 없지요.
슬프게도 이 사회는 패자가 된 사람들을 ‘능력 없는 인간’이라고 주홍글씨를 새깁니다. 한 번 낙오되면 다시는 올라오기 어려운 구렁텅이로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한 번의 낙오로 앞으로 남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참 씁쓸한 세상이지 않나요? 자본주의 시대에서도 중요한 가치들이 많지만 사람의 가치보다 중요한지 참 의문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우리 곁에 아직도 수 많은 전태일이 살고 있습니다.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문제의식 정도는 가져보는 세상.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면 조금 더 나아지는 세상. 한번은 무너져도 일어설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헨리 월리스가 그리고 싶었던 사실주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