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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Mar 20. 2023

언제 할 수 있어요?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오은영 박사를 만나러 갔었다. 눈은 이미 쌓일 만큼 쌓여 더 내릴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도 끊임없이 내렸다. 우산을 받쳐 든 손이 시렸다. 왼손 오른손 번갈아 우산을 바꿔가며 한참을 걸었다. 날은 추웠지만 아이를 낳고 오랜만의 혼자 외출이라 그런지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이 상쾌했다. 강연장 안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뚫고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녀를 보러 온 엄마들이 강연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자리를 찾아 앉았다. 10분 정도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궁금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온 신경은 집에 있는 아이에게 가 있었다. 강연 시간이 되었고,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오은영 박사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와 무대 중앙에 섰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인사조차 하기 전에,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터져버리다니. 그동안 육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첫돌이 되기 전의 일이다.   

  

 ‘육아의 목적은 자녀의 독립’     


 오은영 박사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기 전에는 그저 아이가 태어나 받은 기쁨이나 육아의 수고스러움만을 생각했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기까지 겪는 모든 과정에서 내가 맡은 책임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 몸이 편해지려고, 아이가 걷기를 바라거나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독립된 존재로서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들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것이 즐거운 일이라면 그 기쁨은 당연히 아이의 것이고, 그것이 괴로운 일 일지라도 그것 또한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부모는 그저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혼자 설 수 있는 날까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 것이다.   


   

 아이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내면서 주변의 선배 부모들에게 제일 많이 한 질문은 ‘언제쯤 할 수 있어요?’였다. 아이는 돌이 지나도 잘 걷지 못했다. ‘언제쯤 걸어요?’라고 물었다. 두 돌이 지나도 말을 하지 못했을 때는 ‘언제쯤 말해요?’라고 물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밤에 실수할 때도, 혼자 밥을 먹지 못할 때도, 끊임없이 질문했다. 대체로 이런 질문들의 답은 ‘때가 되면 다 한다’였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먼저 아이를 낳고 키워본 부모 또는 조부모들의 그런 말에 힘을 얻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들의 말처럼 때가 되니 어제는 할 수 없던 것을 오늘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마냥 손 놓고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고, 나이에 맞게 가르쳐야 했고 인내심도 필요했지만 말이다.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걱정과 달리 아이는 즐겁게 다니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나와 오가던 길을 혼자서 가보고 싶어 하거나, 물건을 살 때는 자신의 용돈으로 계산하고 싶어 했다. 돈 계산이 느려 천 원짜리를 한 장씩 꺼내어 시간은 다소 걸렸지만 나는 기다려주었다. 태권도장이나 축구하러 가려고 할 때 걱정은 되었지만 혼자 보내보았다. 축구가 끝나고 데리러 가보니 외투를 반듯하게 접어 소파 위에 올려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대충 나에게 옷을 던져주고 축구하러 가던 아이였는데 엄마가 없으니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나 보았다. 아이는 그런대로 자신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부모 없이 혼자 있는 것이 아이의 독립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나 없이 할머니 집에서 자던 날, 오히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나였다. 아이가 없이 혼자 자려니 무언가 허전했다. 혹시나 자다가 깨서 나를 찾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다음날 시어머니에게 전해 들으니 아이는 아주 ‘잘’, ‘나를 찾지도 않고’ 잤다고 한다. 그런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던 아기가 언제 커서 엄마 없이 잘 수 있는 ‘형아’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이런 종류의 기쁘지만, 서운한 일들이 시작되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아이는 더욱더 엄마가 없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할 것이다. 그때가 되어 섭섭하다고 아이의 독립을 방해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나도 아이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육아의 목적은 누가 뭐래도 아이의 독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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