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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ul 03. 2023

애도의 시간

 “엄마, 올해는 농사 안 지어?” 

 “응, 힘들어서.”

 “작년에 농사지어서 좀 남았어?”

 “손해 봤어.”

 엄마와 나는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지금 와서 말이지만, 작년에 풀 뽑느라 힘들었어.”

 “맞아, 나도 힘들었어. 농사 그거 아무나 짓는 거 아이드라.”   


  

 아버지 첫 기일에 내려가 보니, 집 옆의 큰 밭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엄마는 힘들어서 올해는 농사를 못 짓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에게 밭을 빌려주기로 했다고. 우리집은 1993년에 포항으로 갔다가 2008년 영주로 다시 왔다. 아버지는 다시 온 고향 땅에서 15년을 살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부모님이 포항에 집을 샀고, 고모도 가까이에 계셔서 그곳에서 노년을 보낼 거로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늘 영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엄마는 포항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엄마의 만류에도 아버지는 기어이 포항 집을 팔고, 영주에 땅을 사더니 그 옆에 집을 지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만 치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할 일이 많았었다. 아버지의 사망신고와 통장 정리, 국민연금부터 시작해서 땅과 집의 명의이전까지, 일 처리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남은 일을 마무리 짓느라 나는 혼자서 몇 번 영주에 내려가야 했고, 지인에게 법무사를 소개받아 상속과 관련된 일을 맡겼다. 한동안 우리 남매는 영주와 서울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어수선한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엄마는 동네 지인과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땅에 농사지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농사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농작물마다 심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가 달랐다. 한여름 뙤약볕과 시원한 빗줄기는 농작물이 자라게 했지만, 잡초도 무성하게 했다. 나는 엄마가 한여름에 풀을 뽑다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되어, 거의 매일 통화를 했었다. 너무 더운 시간에는 밭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농사일이 힘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기를 수백 번. 그때마다 엄마는 외손자가 오면 감자 캐는 경험을 하게 해주겠다, 참깨를 심어서 고마운 분들에게 참기름을 나눠주겠다, 하며 들떠있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엄마는 농사일에 목숨 건 사람처럼 매일 무언가를 심거나 풀을 뽑았다. 우리 남매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여름에 집에 가 보니, 밭에는 온갖 농작물들이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고추, 상추, 깻잎, 오이, 가지, 호박, 감자, 대파, 옥수수 ……. 한쪽이 덩그렇게 비어있어 물어보니 거기는 고구마를 심을 거라 했다. 작은 집에서 얻어 온 고구마 순이 대야에 담겨있었다. 엄마와 나는 일 바지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함께 밭으로 들어갔다. 고구마 순의 밑 부분을 조금 부러뜨린 후, 손가락에 힘을 주고 비닐을 뚫고 흙 밑으로 쑥 밀어 넣으면 된다고 했다. 일러준 대로 잘하고 있는지, 엄마는 내가 심은 고구마 순을 다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렇게나 넣어놔도 잘 산다며 대충 하라고 하더니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고구마 순을 밀어 넣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멀리 산 속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뻐꾹, 뻐꾹, 뻐꾹, 끝도 없이 울어대는 소리를 세고 있다가 속으로 웃곤 했었다. 뻐꾸기시계인 줄 착각하고 몇 번인가 세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면 생각은 시간을 훌쩍 넘어가곤 해, 엄마 혼자 이 밭에서 저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을 할 모습이 그려져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었다. 몸이 힘들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고 반복되는 노동에 기억은 과거를 다녀왔다.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고구마 순을 집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여름휴가 동안 엄마 곁에서 고구마도 심고, 풀도 뽑으며 농사일을 했다. 일하다가 힘들면 수돗가에서 세수 하고, 수박을 잘라 먹었다. 점심에는 삼겹살을 구웠고, 엄마가 기른 상추쌈을 싸 먹었다. 그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빈 공간을 채우듯 고구마를 심었고 슬픔을 잊듯 잡초를 뽑아냈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죽었을 때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 엄마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농사 같은 건 다음 해에 하면 어떠랴 싶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보내고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밭일을 하며 나 역시 애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슬픔의 크기나 모양이 다르듯, 애도하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슬픈 일을 겪으면 빨리 잊어버리라고 한다.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며 슬픈 감정을 억누르게 한다. 어쩌면 우리 남매도 엄마가 슬픔은 빨리 잊고, 즐겁게 지내기만을 바랐는지 모른다. 장례식이 끝나고 49제가 지나서도 엄마는 아버지가 남긴 밭에서 한여름 무더위와 싸우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휑하게 비어있는 밭이 당신 마음 같아서 보기 싫어 뭐라도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가 작년에 새로 산 농기구들이 창고에서 잠을 자고 있다. 새 삽으로 땅을 파던 엄마의 모습이 삽과 함께 반짝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그 시간을 견뎌왔다. 이제 아버지의 첫 기일, 우리는 아버지를 진짜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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