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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ul 17. 2023

스무 권의 토지

    

3월부터 읽기 시작한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가 지난주에 끝이 났다. 함께 글 쓰는 지인들과 일주일에 한 권씩 읽기로 정했었다. 아들은 몇 주째 똑같은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왜 매일 토지만 읽느냐고 물어보는 아들의 얼굴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책은 스무 권짜리이고 지금 4번째를 읽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들이 읽는 학습만화가 9권 째 나오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설명해주니 단번에 알아들었다.     


 

 한꺼번에 스무 권을 사놓으려니 책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고, 20만 원도 넘는 목돈이 들어가는 것도 어쩐지 내키지 않아 책을 한 권씩 주문했다. 오늘 주문하면 늦어도 다음날 밤이나 그다음 날에는 배송되는 시스템이라 읽는 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책 읽는 속도가 책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토지만 읽는 것이 아니라, 필사할 책과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다른 책도 주문하니 읽어야 할 책은 쌓이고, 책을 읽느라 집안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자연스레 아이와의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다.    



 아이는 책을 즐겨보는 편이다. 아이가 글자를 읽기 전부터, 나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그 덕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에 익숙해진 것 같다. 어쩌면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성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는 가족 셋이 보드게임을 하고 나서나,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슬그머니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 읽기를 즐기는 나에게 그 시간은 소중하다. 나도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나 역시도 책읽기를 즐기는 편이다. 세탁기가 돌아가거나 밥이 되는 등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을 본다. 어떤 때는 아이와의 놀이에서 벗어나 쉬고 싶을 때 책을 보는 경우도 있다. 책을 보면 책 안의 세상에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편함이 좋다.  


    

 토지를 읽으면서도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져버렸다. 어쩌다가 남편이 늦는 날에는 아이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설거지도 미룬 채 책을 읽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내가 토지만 읽으니, 아이는 자기와 놀아주지 않고 책만 읽는다며 속상한 내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권씩 읽기로 약속해서 빨리 읽어야 한다며 아이의 요구를 피하곤 했다. 이제는 혼자 놀라고 하거나, 너도 책을 보라고 타이르며, 아이를 내버려 둔 채 토지를 읽었다. 처음에는 아이도 속상해하더니 차츰 나의 토지 읽는 스케줄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진도가 느리면 꼴찌 하려고 그러느냐며 나의 책읽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대견했고 이제 나를 이해 해주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의젓해도 8살은 어쩔 수 없는 8살이었다. 아이는 자기의 속내를 감추고 참고 있었다. 8권쯤 읽었을 때였던가, 그 주에는 웬일인지 진도가 잘 나가서 목요일인데도 벌써 그 주 분량을 다 읽었다. 나는 아들에게 이번 주 분량을 다 읽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고 했다.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속상함을 토로했다. 

     

 “이번 주에는 토지를 다 읽었으니까 나랑 놀아주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토지 읽는다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았으면서……. 속상해.”     


 아이는 그동안 내가 책을 읽고 있으니, 놀아달라고 말도 못했던 것이다. 나 혼자만 진도가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책을 읽지 말라고 떼를 쓰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참고 참다가 눈물이 터져버린 아이는 울먹이면서도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우는 아이 앞에서 웃었다가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웃는다며 속상해했던 적이 있어 웃지도 못했다. 나는 겨우 웃음을 참고 아이를 달래주었다. 달래면서 생각하니 그동안 아이에게 그림책도 잘 읽어주지 않았고 놀이도 대충 해 주었던 것이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이게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 일인가 싶어 황당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 토지 읽지 말까?”

 “아니야. 읽어도 돼.”

 “이제는 선우가 학교에 있을 때 얼른 읽을게.”

 “알았어. 그런데, 이제 토지 몇 권 남았어?”   

  

 이런 대화를 하고 나서 아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나도 아이와의 약속을 지켜가며 적절히 조절하며 토지 완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토지가 끝나고 읽기로 예정되어 있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지난주에 도착했다. 우선 주문한 여섯 권이 들어있는 책 박스를 본 아들은 화들짝 놀랐다. 나는 어색하게 아들에게 웃어 보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어? 그래도 이건 뭐, 여섯 권밖에 안되네.”

 “아들, 이거 열 세권짜리야. 나머지는 다음 주에 올 거야.”

 “하하하. 그래도 토지 보다는 적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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