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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Dec 15. 2023

#17. 주제파악 제대로 된 겨울캠핑

무겁고 아프도다

올해 가을, 입원 중이던 아이는 전에 갔던 바다가 보이는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래. 가자! 서둘러 가장 빨리 예약이 가능한 주말을 찾았으나 두 달을 기다려야 했고, 드디어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오랜만에 겨울 캠핑, 준비할 게 많다. 한 동안 미니멀 캠핑을 다니겠다며 초경량 장비로 다 바꾸고, 조립하다 날 새겠네 하며 무겁지만 설치가 쉬운 장비로 돌아온 터라 대부분의 짐은 집에 있는데도 차에 짐이 이미 가득이다. 나름 3년 차 캠퍼의 테트리스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이게 2인분 짐이라니


2박 3일 일정이라 큰 텐트와 팬히터, 난로까지 챙겼더니 트렁크가 꽉 차버렸다. 나머지 자질구레 짐들과 기름통들을 뒷 좌석에 야무지게 쌓아본다. 급 정거하면 저것들이 덮칠까 두려울 정도지만, 일단 짐 싸기는 성공이다. 이제 떠나면 된다.



나 안 가면 안 돼?

주말이라 아이는 늦잠에 빠져 일어날 생각이 없다. 한참 전부터 오늘 캠핑 간다는 것을 계속 말했기에 짜증은 안 내지만 잠에서 깨기 힘들어 보인다. 태안까지 약 4시간, 겨울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텐트를 치기도 전에 해가 질 것이므로 마음이 급하다.


간신히 아이를 깨우고 마지막으로 먹을 것들을 차에 넣어두고 오니 준비는 안 하고 우아하게 태블릿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엄마, 나 안 가면 안 돼? 이거 주말까지 다 그려야 한단 말이야. 커미션 받은 거야. 엄마 혼자 가" 

(나도 잘은 모르지만, SNS 등에서 맘에 드는 그림체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주고 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커미션이라고 하는 듯하다.)


"안돼, 할머니도 모임 가셔서 저녁에나 오실 거고 2명분 짐이라 차가 꽉 찼는데 다시 못 빼. 그리고 엄마랑 약속했잖아."


길고 긴 설득에도 아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며칠 동안 퇴근하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짐을 옮겼건만, 이게 왠 날벼락. 어쩔 수 없이 노트북과 22인치 태블릿 모니터, 액세서리까지 꽉꽉 챙겨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바람아, 멈추어 다오

휴게소의 라면과 돈가스를 좋아하는 아이와 중간에 식사도 맛있게 하고, 너무 늦지 않게 태안에 도착했다. 그새 고급 펜션으로 탈바꿈한 곳이 낯설지만, 캠핑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풍경은 실컷 볼 테니 추워지기 전에 얼른 집을 짓자. 


가져간 텐트는 모듈형으로, 이전에 차박용으로 썼던 것을 거실형으로 쓰기 위해 중간에 추가 모듈을 연결해 가져왔다. 한 번 쳐본 텐트기에 쉽게 생각했는데.. 웬걸. 반대편 오징어핀이 무슨 수를 써도 끼워지질 않는다. 바람 부는 추운 바닷가, 얼굴이 빨개진 채 산발이 되어 용을 써본다. 40분, 1시간이 넘어가고 이젠 포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일 때, 마침 사장님으로 보이시는 남자분이 지나가셔서 부탁을 했더니, 뚝딱! 끼워주신다.


남자의 힘은 그런 것이었다. 바득바득 해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용을 쓰던 한 시간이 허무해졌다. 그래도 고마운 사장님 덕분에 뼈대는 만들어졌으니 이제 텐트를 세워야 하는데 본격적인 강풍이 불기 시작한다. 아이가 잡고 내가 팩을 박고, 내가 잡고 아이가 팩을 박고... 깜깜해져서야 허술하게나마 집이 완성되었다.


휴... 이 놈의 텐트, 또 바꿔야 하나.

나도 남자의 힘을 갖고 싶다고



우리 날아가지 않겠지?

허술한 텐트지만, 정말 대애충 짐을 던져두고 난방부터 한 뒤 식사를 준비했다. 잠시의 삼겹살 타임은 너무 행복했으나 강풍에 텐트가 곧 날아갈 것 같다. 먹다 나가 팩을 박고, 또 박고, 옆에 펜션 울타리에 끈을 묶느라 제대로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오늘 밤 무사하게 하소서.


난장판 속 식사 / 그 와중에 너는 예술, 나는 노동



아이고 삭신이야

따님의 그림 장비 덕에 나는 이너텐트 밖에서 잤으나 전기매트 덕분인지 춥지 않게 잘 잤다. 그러나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전 날의 용씀에 온몸이 아프다. 팔 아픈 거야 이해가 가는데 다리는 왜 쑤신 건지. 거울 속엔 당장 서울역에 가서 자리 잡아도 될 것 같은 꼬질꼬질한 아줌마가 있다.


그래도 이너텐트에서 편안한 얼굴로 이불을 차며 자고 있는 딸을 보니 안심이 된다. 춥고 고생스러울 줄 알면서도 군말 없이(?) 따라와 나와 함께 하는 딸이 고맙고 예쁘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그림 그리기로 바쁘고 나는 책을 보며 한가한 캠핑장의 둘째 날을 즐겨본다. 주저앉고 허름한 움막같이 대충 쳐진 텐트 안이지만, 이제야 밖에 경치도 보이고 캠핑을 즐길 여유가 생긴다.


다만, 내 머릿속은 이런 힘든 캠핑을 계속해야만 하나 어지럽다. 책을 보다 덮고 '설치가 쉽고 가벼운 텐트'를 검색해 보다 세상에 그런 건 없거나 엄청 비싸지! 하는 현실을 깨닫고 다시 책을 펴고, 다시 덮고 또 검색한다. 


둘째 날은 근처 오션뷰 카페 구경도 하고 드라이브도 하려 했으나 꼼짝 않는 딸 덕에 나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 쉬자.


이런 곳이라.. 힘들어도 오게 된다.



만만치 않은 철수

나는 영화와 와인과 함께, 아이는 그림과 친구와의 통화와 함께 같이 있지만 따로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 집에 가는 날이다. 빨리 가서 쉬기 위해 새벽부터 짐을 쌌다.


아이가 자고 있으니 짐을 효율적으로 뺄 수도 없고, 난방용품도 치울 수 없으니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아침이 되어 아이를 깨워 펜션 카페에 있으라 한 뒤, 마지막 힘을 내어 짐을 정리했다.


아.. 힘들다. 힘들어. 아프다. 아파.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텐트를 치느라 고생했던 팔다리는 이틀째 통증이 더 심해졌고, 바람을 피해 왔다 갔다 하며 팩을 박다 어딘가 부딪힌 팔은 퉁퉁 부어올랐다. 집에 가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이를 악물고 모든 짐을 다 싣고 바다와 인사하며, 서울로 출발.


"꼬마화가, 캠핑 즐거웠니?"

"응"

"또 오고 싶어?"

"아니, 추워"



아이와 약속을 지켜 보람찼지만, 현실을 자각하게 된 계기가 된 캠핑이었다. 내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내가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는 맥시멀리스트라는 것도.


가볍게 다니고자 했던 캠핑의 초심은 어디로 가고, 거의 원룸 하나를 꾸밀 수 있는 짐을 들고 다니는 게 정상인가 현타가 왔다. 바닥에서 자면 어떻다고 야전침대도 챙기고, 아이패드로 봐도 되는 영화를 굳이 무거운 휴대용 티브이까지 가져가고 말이다. 


무엇보다 내 몸이 견디질 못했다. 여기저기 다치고 터진 몰골을 보니 이제 내 몸도 좀 아껴야겠다. 그래서, 겨울 캠핑은 이제 안 하려 한다. (음.. 이 얘기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아이와 난방이 필요한 날씨에 캠핑을 하고 싶으면 글램핑을 하기로 하고 용품들을 정리할까 한다. 


성격상 당장 했겠지만, 힘줄을 정통으로 다친 팔에 아직 짐을 빼지도 못했다. 많이 나았으니 이번 주말부터 슬슬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힘들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배울 수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행복했다. 엄마가 만든 보금자리 안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던 아이는 편안해 보였다. 곡소리 내던 엄마지만, 그래도 아이는 든든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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