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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Jul 13. 2024

나의 친구 와인이여...

우리 잠시 떨어지자

막걸리는 유산균이요, 훌륭한 식사대용임을 주장하며 1일 n병 하시던 아빠의 애주 유전자는 그대로 나에게 왔나 보다. 위 그림은 아이가 어릴 때 막걸리와 두부로 식사를 해결하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티격태격을 표현한 것이다. 아이 그림을 보고 귀여워 깔깔대고 웃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아빠 대신에 나를 그려 넣어야 할 판이다.




내 마음이 아픈 지 1년

꽤 시간이 흘렀는지 알았는데 이제 1년이다. 사진첩 속 1년 전 내 모습은 5년은 어려 보인다.

아이의 등교거부와 사춘기로 탈탈 털리는 삶을 살다 보니 타고난 근육질 체형과 까만 피부의 탱탱함의 젊은 40대 그녀는 언제 그랬대요? 싶게 푹 꺼지고 구부정한 중년이 되어 버렸다.


내 딸이 항상 이쁘고 멋지다는 엄마는 이제 "너 염색 좀 해야겠다" 하신다. 허허.


디자인은 문제 해결이죠! 당당하게 외쳤던 구 디자이너 길치는 자신의 문제에선 길을 못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그때도 지금도 길을 잘 못 찾겠다. 힘들다 보니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자연스레 사람도 안 만나게 되었다.


나는 와인과 친구가 되었다

원래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내 삶이 편안할 때 이야기다. 막상 힘드니 위로와 관심이 힘이 많이 된다.  그러나 빚지고는 못 사는 나는 상대방의 고민도 같이 품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람을 멀리하고 있다. 내가 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말 혼자인 사람이 되었다. 딱히 외롭진 않지만 문제는 밤마다 한잔 하는, 아니 가끔은 한병도 하는 와인이다. 수년 전 <부부의 세계> 드라마에 김희애 씨를 보며 '매일 와인 한 병씩이라니... 저렇게 마셔도 다음날 진료를 보는 게 대단한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허구의 인물을 보며 쓸데없이 진지하게 생각했었던 것이지.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어른도 이런데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은 얼마나 큰 것인가? 미디어 제작자들은 각성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


어쩌다 내 입맛에 찰떡인 미국 나파밸리 와인을 알게 되었고, 수제맥주 마니아였던 나는 맥주를 배신하고 와인으로 넘어갔다. 지하 나만의 공간에서 맛있는 와인 한 잔을 마시면 벌떡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고 아이에게 한 번 더 웃어줄 수 있고 강아지 산책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매일 비싼 나파밸리 와인을 마실 수 없으니 비슷한 맛이 나는 저렴한 와인을 찾는 것도 재미있었다. 맛있고 저렴한 와인을 찾으면, 여러 병씩 쟁이며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보다 더 한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다.


와인도 술일뿐...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와인이지만 언젠가부터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매년 건강검진을 해도 항상 건강한 간수치를 보여주던 튼튼한 내 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면 유난히 노랗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간에 문제가 있구나. 올해 건강검진 때는 금식을 해서 그런지 수치는 정상으로 나왔지만,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안 마셔봤다. 일종의 테스트랄까?

노랗던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예뻐 보이고 아령을 들고 싶은 에너지도 충전이 되었다. 머리도 쌩쌩 돌아간다.


역시, 와인도 술이었구나.


그러나 이별은 싫어

아이가 커서 독립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게 나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다. 고요하게 걷다 숙소에 와서 순례자들과 와인 한 잔 하며 호탕하게 웃는 내 모습이 내가 그리는 50대이다. 그러니 와인을 끊을 순 없다. 와인맛이 얼마나 좋은데...


그래서 혼자 하는 와인만 끊기로 했다. 다행히 최근 물에 타마시는 애플 사이다 비니거에도 푹 빠졌다. (항상 마실 걸 달고 사는 편)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만 마시면 내 간도 괜찮겠지?


아직 술을 끊고 싶진 않다. 핑계라면 취할 때까지 마시지도 않고 실수한 적도 (최근엔) 없다. 정말 와인이 필요할 때 그때 마시련다.


반전

그래서 오늘 혼자 마시는 와인과 인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함께 했다.




아빠도 참 조용한 애주가셨다. 식탁 한 편에서 막걸리를 따서 한 병, 두 병 드시고 잠자리에 드셨다. 젊을 때 얼쑤~ 하고 들어오시던 취한 아빠도 기억나지만, 나이드셔선 늘 조용히 막걸리만 비우셨다. 그땐 점점 안 좋아지는 아빠의 혈색과 또렷하지 않은 발음에 성을 내며 나무라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젠 알겠다. 아빠가 왜 조용히 막걸리와 친구 하셨는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이제야 아빠가 이해되고 그때 술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음이 너무 아쉽다. 하지만, 아빠를 따라가진 않으련다.

아빠는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나는 더 살아 딸과 엄마 곁에 있어야 하니까.

그러니 와인아 나와 1대 1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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