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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pr 06. 2021

우연의 주사위

이맘때가 되면 자주 M이 생각난다. 그는 사내의 외국인 계약직 직원 중 하나였다. 날렵하게 생긴 매부리코가 다소 눈에 띌 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서양인이었다. 어느 날 오후, 커피를 마시려고 탕비실에 갔다가, 커피포트를 들고 있던 그와 마주쳤다. 그는 반쯤 남아있던 커피를 종이컵에 따른 후 그것을 내게 먼저 건넸다. 작은 친절이지만 기분이 좋아졌고 그에게 호감이 갔다. M과의 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퇴근 후 술자리를 몇 번 가지면서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 또한 적은 편이었지만, 그는 시시한 내 얘기에 자주 웃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뒤편 술집을 자주 찾았다. 그 동네는 사계절의 이름을 딴 술집들이 있어서, 우리가 술을 마시던 곳은 언제나 봄이거나 여름, 가을이거나 겨울이었다. ‘우린 겨울인데, 너는 어디니?’. ‘기다려 내가 봄으로 건너갈게’. 술집에서 사람들은 가끔 이런 식의 전화도 주고받았다. 


12월 초 그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급기야 퇴근 무렵에는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퇴근 후 별 약속이 없었던 우리는 ‘가을’ 인가 ‘겨울’에서 첫눈을 기념하며 술을 마셨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마셨는데, 돌연 그가 자기 집으로 2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그의 집은 아현동 골목 초입에 있었고, 제법 잘 관리된 한옥이었다. 독신으로 혼자 지내기에는 비교적 큰 집에 마당 한쪽에 작은 화단까지 있었다. 다소 쌀쌀했지만 우린 툇마루에 앉아 허공에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는 작은 USB 하나를 가져와 노트북에 연결했다. 


기타 반주와 함께,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커버 곡이었다. 목소리는 애잔하고 감미로웠지만 북한식 발음이 섞여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M의 박수 소리와 함께 여자의 쑥스러운 듯한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M 자신의 얘기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열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우연한 기회에 한 여자를 만났으며, 체류 기간을 연장해 6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다 왔다는 것이 골자였다. 아마도 그 ‘한 여자’가 노래의 주인공이었으리.


이후로도 가끔 그와 어울려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계약 기간이 종료되어 그는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나 역시 우연히 M의 모국으로 발령을 받아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그를 잊었다. 낯선 환경과 업무, 새로운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밥과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았다. 


그의 소식을 접한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현지 신문에 난 큼직한 한 장의 사진, 미국의 유명한 프로 농구 스타와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장면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 뒤편에 서 있는 M의 모습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사진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어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그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아냈고 의례적인 안부와 함께 사진의 배경과 이유를 물었다. 며칠 후 그에게서 날아온 답변은 좀 생뚱맞은 것이었다. 우주의 별은 1초에 수만 개가 사라진다는 말과 함께, 두 단어로 이루어진 부사어가 끝을 맺지 못한 채 타이핑되어 있었다. 


By chance...

나는 단어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깜빡거리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가볍게 손을 흔드는 듯한 그의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고, 빛을 그으며 사라지는 어떤 유성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 이후로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의 페이스북 계정도 돌연 사라졌다. 


우연. 스무 살에 읽은 어떤 책에는 그것 또한 원인과 결과에 따른 필연이라고 씌어있었다. 서른 살에 읽은 책에는 장난기 많은 신들이  주사위를 던지며 노는 곳이 세상이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만나 짧게 스쳐 지나쳤을 뿐이다. 그래도 이맘때가 되면 간혹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한 여자의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던 어떤 사내의 낮은 허밍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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