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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세 May 07. 2021

팬데믹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3)

<죄와 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유토피아의 꿈


문학 평론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첫 줄에 이렇게 쓴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한 가야만 할 길의 안내판 구실을 하늘의 별이 해주는 시대는 행복하다.” 외부와 내부, 정신과 육체,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지 않고 행복한 공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 미학 체계에서 인용한 개념으로, 그것에 따르면 대립하는 고대와 근대, 그리고 그 지양태로서 제3의 세계가 존재한다. 희랍 예술은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주관과 객관의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인류사에서 최고 예술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의 최고 규정은 희랍 시대로 끝나 버린다.


그 이후 근대가 시작되면서 깨진 ‘행복한 공존’은 근대의 다양한 병적 상태를 유발한다. 세계는 외부와 내면, 정신과 육체, 주관과 객관으로 갈라지며 정신은 내면화의 여행으로 은밀히, 깊게 행해지기에 아무도 이웃사람의 체험을 함께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현상, 훼손된 가치 속에서의 인간 소외 현상, 혼자 있음을 인간의 본질적 존재 조건으로 하는 전위예술(모더니즘)의 출현이 바로 그런 상태의 구체적 예시다.


루카치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자아 주의 상태에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찾고 해방하는 방식이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 소위 교환가치 혹은 훼손된 가치 속에서의 인간 본질 파악은 그 존재의 기반이 ‘혼자 있음’으로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또한, 그런 바탕 위의 예술은 인간을 이해 불가능한 ‘낯선’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데, 한마디로 인간은 병적이자 병리적인 미학을 낳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루카치가 말하는 ‘소설’이라는 형식은 ‘신이 떠나버린 세계의 서사시’다. 삶의 총체성은 이미 상실되었고 내적 의미가 근대 소설 형식의 새로운 문제로 부상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과거와 같은 총체성에의 지향을 지닌 시대의 서사시로 규정된다. 그가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라 표현하듯, 소설 속 주인공들이 떠나는 자기 존재 증명으로의 여정은 이미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와의 어긋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3의 세계, 즉 궁극적 ‘이상 세계’가 도래하지 않는 한, ‘나를 찾는 행위’는 빈번히 실패할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 ‘총체성’을 향한다는 목표가 주어졌고 그 참된 가치를 향해 길을 가야 할 이유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출발과 동시에 길을 찾을 사유 기반이 붕괴된 상태에 놓인 것이 소설이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19세기 격변하던 시대 속에서 세계와 러시아 사회를 바라보는 당대 모든 지식인 역시 자연히 가장 최상위의 ‘이상’을 꿈꾸게 되었다.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던 러시아 작가들은 소설을 통해 그들 국가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모색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서구 주의자와 슬라브 주의자들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후자에 속했던 대표적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합리성’을 표방하던 서구 근대 문물이 야기하는 혼란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대신에 그는 지극히 러시아의 전통적인 것, 혹은 종교적인 요소의 영향 아래에서 그 이상성을 피력한다. 또한 목가적, 혹은 영웅적 상태는 그러한 작가의 이상이 반영된 제3의 세계로서 작가의 소설 곳곳에서 묘사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그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다. 널찍한 전망이 펼쳐진 들판, 아득한 저편의 둑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함께 흩어져 점으로 보이는 유목민의 마을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펼쳐진 장소는 그가 밟고 있는 땅에서의 삶과 달리 자유롭고, 시간 자체가 아예 멈춰 있어 아직 아브라함과 양 떼들의 시대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마음을 애수로 뒤덮고, 설레게 하는 그곳의 전경은 바로 작가가 가졌던 이상적 세계의 표상이다.


이것은 멋진 꿈이며, 위대한 망집이다. 황금시대. 이것이야말로 원래 이 지상에 존재한 공상 중에서 가장 황당무계한 것이지만 전 인류는 그 때문에 평생 온 정력을 다 바쳐 왔고 그 때문에 모든 희생을 해 왔다. 그 때문에 예언자로 십자가 위에서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했다. 모든 민족은 이것이 없으면 산다는 일을 원치 않을뿐더러 죽는 일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다.
 
-도스토옙스키 <악령> 제2부 스따브로긴의 고백 동서 문화사 601쪽-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다른 작품 <악령>에서 인류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을 ‘황금향’이라 명명한다. 누구나 염원하는,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떠한 희생과 노력 끝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유목민들의 마을은 어렴풋이 아른거리지만, 결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묘사되지 않았기에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희미한 실루엣으로 막연히 그 자유로움을 아브라함과 양 떼들에 연관 지어 짐작할 뿐이다. 그곳은 아직은 닿을 수 없으며,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끔 먼 거리감에 가로막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제3의 세계에, 인류가 염원하는 황금시대에, 혹은 총체성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루카치는 소설을 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근대 인간의 개별성으로 인한 ‘병적 상태’를 극복하고 인류사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그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아직은 존재조차 불확실하기에 ‘유목민의 마을’로 그 궁극적 이상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한 발판이 인간의 ‘회복’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드러난다.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 하나하나가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용기로 실천적 사랑을 실현하며, 단절로 인한 증오와 갈등이라는 병적 상태를 극복한다. 그렇게 모인 개인들이 거대한 집단으로서 자각하는 것이 이를 위한 순차적 단계다. 인류가 다시 완전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는 이와 같은 성장을 밑바탕으로 한 ‘성숙한 개인의식’이다. 고대 이후 상실된 총체성은 이렇게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죄와 벌>의 아주 짧은 시간은 놀랍게도 현대와의 연장선에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오늘날 ‘거리 두기’로 약해진 서로 간의 네트워크는 사회적 고립을 야기하며 공동체를 더욱 삭막하게 한다. 확진자나 격리 대상자의 동선 파악을 위해 특히 강화된 추적 시스템은 개인의 사생활을 노출하고 그들을 향한 또 다른 혐오를 낳았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확산하는 차별과 갈등은 더욱 극단화되며,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 시스템을 향한 공포 역시 점차 뚜렷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결국,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전염되는 단절감과 인류애의 상실이다. 혐오와 증오가 만연한 사회가 낳는 ‘인격적’인 죽음은 바이러스로 인한 물리적인 죽음보다 더욱더 심오한 공포를 불러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은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러시아의 또 다른 대 문호 톨스토이 역시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간다"라고 말했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의식은 분명 특정한 누구만이 가진 것은 아니며, 꼭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은 연대감의 상실을 넘어서 ‘혐오’와 ‘차별’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기에 국가나 인종, 성별 따위를 넘어선 ‘인류애’의 실현이 더욱 절실하다.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그것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경고한다. 그러지 못했을 때 어떤 파괴적인 결과가 뒤따를지를 비참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결말을 통해 보여주면서 말이다.


전문가들은 팬데믹을 견뎌내는 인류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예고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만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인류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치료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 밑바닥을 보면서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서로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용기를 겸비한 자는 소냐뿐만이 아니다. 라스콜리니코프 곁에는 그를 떠나지 않고 지켰던, 소냐만큼이나 그를 사랑하는 두냐와 라주미힌이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들이 모여 서로의 힘이 된다면, 그렇게 우리 모두가 실천적으로 행하는 사랑이 존재한다면 궁극적인 희망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끝맺으며


자체 제작 일러스트와 함께..



더 많은 일러스트 보러 가기: 세세_일러스트(@sese_grim)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사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은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완전히 잘못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고자 자수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유형지에 도달해서야 드러나는 그의 '갱생 가능성'에 대한 암시만이 실낱같은 희망을 주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곳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렴풋이 짐작한 유목민의 마을도 마찬가지 의미다. 명확하지 않은 그 모습은 마치 인류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작가는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인류 구원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하지만 끝까지 이 황금향이 도래하리라 확신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은 열망만이 소설 곳곳에 드러날 뿐, 여전히 인류의 운명은 끝까지 모호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니 말이다.




참고 문헌: 문학에 대한 열두 가지 질문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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