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저장하기

오늘의 詩

by 박동욱


비오는 가을.png





가을, 저장하여름은 뒤도 안 보고 사라졌다.

명절 연휴 포장지만큼은 비에 젖어 구겨진 채 모퉁이에 놓였다.

가을비 내리는 거리에서 단풍은 느리게, 자기 이름 색을 익혀간다.


나는 서랍을 열어 카메라를 꺼낸다.

배터리를 갈아끼우며,

이번엔 먼저 내게 초점을 맞춰본다.


이번 가을엔 찍는 데만 그치지 않기로 했다.

글을 써야지.

도대체 뭐에 홀렸던 건지, 허둥대며 흘려보낸 시간들한테

조용히 미안하다고 말해본다.


거창할 것 없다.

내 글, 내 사진, 내 영상 안에 이 계절의 따뜻함과 냄새를 담고 싶다.

바람 끝에 묻어드는 온기, 흙이 젖어 풍기는 향,

또 창틀에 와닥닥 부딪혀 사라지는 빗방울 소리까지.


마흔 끝에 선 내 삶은 길게 풀린 목도리 같다.

비 맞지 않게 한 겹씩 천천히 감아본다.

그리고 메모리 카드가 얼마나 남았나 확인한다.

오늘 남겨둔 그만큼의 여백만큼, 나도 살아 있구나 싶다.


셔터 소리는 순간을 닫으면서도

또 다른 문장을 열어주는 소리다.

한 번씩 누를 때마다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은 조금씩 가셔가고

새로운 문장이 또렷해지는 느낌.


이제 이 계절과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날 테니

조금 무모해져도 괜찮다.

작은 조각이라도 꽉 붙잡아본다.

비가 그치고 나면 나도 더 선명해질까,

단풍잎이 바람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처럼.


충전이 끝났다.

진짜로 먼저 충전된 건 내 마음인 것 같다.

나는 가을의 뒷모습을 살금살금 따라가며

기록 버튼을 천천히 누른다.


이 계절이 내게서 모두 떠나기 전에

나는 나를, 여기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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