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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얏 Nov 10. 2021

삭스쇼크

제 1차 삭스쇼크 (2014.8) 

학교에서만 보던 친구를 이태원에서 만났다. 원래도 옷을 잘 입는 친구였지만 그날따라 유독 패셔너블하기에 무엇이 달라졌는고 곰곰이 살펴보니 양말이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에 유니크한 자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친구한테 이렇게 멋진 양말은 처음 봤다고 하니, 진정한 패션피플은 양말까지 신경쓰는 법이라고 했다. 디테일의 완성은 양말이라는 것. 친구의 그 말은 최초의 삭스쇼크를 불러왔다. 나는 그때까지 다이소나 길거리에서 2000원에 3족씩 파는 것만 샀기 때문이다. 유치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도, 어차피 신발 신으면 안 보일거라며 꿋꿋하게 신고 다녔다. 가끔 신발을 벗는 식당에 가면 민망했지만, 그런데도 예쁜 양말을 신어볼 생각은 안 했다. 나에게 있어 양말은 패션의 영역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저 발을 가려주는 천 조각이었을 뿐. 이 일은 내 삶에 작은 경종을 울렸다. 나는 어떤 부분에선 집착적으로 디테일을 추구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선 뭐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내팽개쳐 버리니까. 양말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사는 것도. 

제 2차 삭스쇼크 (2016.11) 

교토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처음 ‘양말 가게'라는 것을 보았다. 양말만 파는 데 무려 가게까지 동원될 일인가. 나는 마치 양파만 파는 양파 가게를 발견 한 사람처럼 놀랬다. 하지만 그때 그 친구의 멋스러움이 떠올랐고, 그날 양말을 5만원 치나 지르고 나왔다. 교환학생 처지에 꽤나 큰 사치였다. 그리하여내가 가지게 된 양말들은 하얀 줄무늬를 가진 노란색 양말, 빨간하트가 그려진 하늘색 양말, 별똥별이 그려진 두툼한 모직 양말 등등이었다. 분수에 넘치는 지출이었지만, 덕분에 양말을 꺼내 신는 재미를 알게 됐다. 

교토 데라마치 상점가에 위치한 양말가게 'Tabio' (구글 스트릿뷰 캡처)

제 3차 삭스쇼크 (2021.6) 

최근 운동을 하면서도 새삼스레 양말에 감탄하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스포츠 양말이다. 아무 양말이나 신고 운동하면 금방 늘어나고 구멍이 뚫리는데, 스포츠 양말을 신고 나서부터는 그런 걱정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기능적 만족감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도 주고 있다. 일단 운동 가기 전에 쫀쫀하고 두툼한 양말을 신으면, 발끝부터 결연한 전투의지가 솟아난다. 양말에서부터 안정감이 느껴져야 무게도 잘 칠수 있다. 런닝머신을 뛸 때도 양말이 두툼해야 런닝화와 시너지가 나면서 안정적으로 뜀박질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양말의 세계에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나는 감정에 있어서도 양말 같은 디테일을 단련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는 쉽게 무심해지곤 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 주니까. 요즘 가장 노력하는 것은 웃음이다. 당신의 말에 적당한 동조와 그러나 완전히 그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라는 여지를 주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 아무래도 쉽진 않다. 아직은 하수라 그냥 웃기만 한다. 언젠가 나도 발끝부터, 마음 속부터 디테일해 질 수 있겠지. 직각 양말, 시스루 양말, 발목 양말, 스포츠 양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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