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혁 애프터 컬처 CEO 세바시 강연 中
간만에 정말 좋은 세바시 강연을 봤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김광혁 애프터컬쳐 CEO. 4억의 빚과 2번의 자살 시도로 주저앉았던 삶.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났는데 눈이 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건강마저 잃은 것. 당시 몸무게가 48kg까지 빠졌었다고. 겨우 병원을 찾아간 그에게 의사가 "당신, 이러다 죽는다"라고 경고했다.
나 이제 디자이너 인생 끝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쯤 그는 공교롭게도 덕질과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가 보고 싶은 거라도 보고 죽자라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영화, 만화, 소설 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인풋이 쌓이다 보니,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소스가 많아졌고, 자연스레 글쓰기도 하게 됐다. 그러다 컨디션이 괜찮아지면, 일을 하러 나갔고, 집에 돌아와선 다시 덕질을 하고 글을 썼다. 그의 유일한 낙이 sns와 블로그에 글쓰기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에선 실패한 디자이너였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달랐다. 초라한 현실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공유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조금씩 삶을 일으켰다. 그러다 영화 <곡성>을 리뷰한 '귀신이 곡할 영화, 곡성' 이란 글이 소위 대박을 쳤다고 한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영화의 메타포, 스토리를 분석하고 해설한 것이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준 것이다.
https://brunch.co.kr/@nitro2red/67
(글을 읽어 봤는데 정말 엄청난 덕력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민속신앙에 대한 자료와 예리한 해석이 그저 감탄...강연에선 쉬운 글을 쓰셨다고 하셨는데...너무나도 쩌는 글이라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ㅎ)
아무튼 이 글을 본 영화 관계자 영화감독에게 연락이 올 정도였고 원고 청탁도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폰트 디자인에 관한 원고를 썼는데, 평소 SNS에도 폰트 디자인에 관한 글을 자주 썼다고 한다.
그는 이 글을 쓸 때도, '덕질'로 닦은 내공을 십분 발휘했다.
폰트가 아닌 폰트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에게 초점을 맞춘 글을 쓴 것이다. 그가 방대한 인풋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으로 주제를 해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디자이너를 조사하기 위해 해외 논문까지 찾아볼 정도였다고....
그가 글을 쓰며 깨달은 건, 위대한 디자이너들도 결국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때론 보통 사람보다 더 힘든 삶을 산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걸까? 정답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것'. 좋은 폰트에는 디자이너의 삶이 녹아있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비겁했던 것 등등 자신의 삶을 직면한 것이다. 글을 쓰며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김광혁 대표.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평생 디자이너로 살아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글쓰기가 인생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이 믿음을 증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도 글쓰기를 통해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원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과거를 털어내는 계기가 됐다. 에세이, 논문, 소설, 시... 어떤 글을 쓰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이해하게 되고, 애써 감췄던 초라한 모습도 드러내야 했다. 글을 쓰는 게 너무 괴로워 몇 개월동안 아무 것도 안 쓴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때 비로소 나는 성장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고르는 작업을 통해, 무조건적인 희망도, 무자비한 절망도 솎아낼 수 있다. 그렇게 나 자신과 직면할 때, 내가 가진 진정한 용기와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인풋을 아카이빙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걸 봐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자기 걸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고. 요즘처럼 좋은 글과 영상을 많이 본 적이 없다. 아쉬운 건 내가 그걸 온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 금방 잊어 버린다. 막연한 여운으로만 남는다. 이게 왜 좋아?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좋은 소스를 차곡차곡 모으고, 짧게나마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부디 이번 작심삼일은 오래 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