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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May 16. 2024

역사, 그 안에 생존을 위해 치열했던 이들이 있었다

파친코1,2(이민진, 인플루앤셜, 2022)

#1. 살고자 발악했던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인가.


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함께 있으니 더 강해질 것이다.
(파친코1, p.171)
각자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다. 가족을 지켜라. 자기 배를 채워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도자들을 믿지 마라. (중략)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세하게 해라. 적응해라. 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 (중략)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동포가 있었다. 결국 배고픔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파친코1, p.276)


함부로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신께서도 말씀하셨다.


-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장 7절)


기울어져 가는 나라가 있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가 있든 없든 그들은 살아가야 했고 살아내야 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잊혔다.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은 그들이었지만 역사는, 시간은 그저 강물처럼 그들의 흔적을 쓸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큰 상관이 있을 것도 아니었다. 그게 삶이니까.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살고자 발악했고, 결국 살아냈다.


저마다 사연은 달랐지만 목적은 한결같았다. 내 한 몸을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는 것. 그뿐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게 설사 낙인이 되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 거칠고 억척스러운 그들의 생존, 그 뒤편에는 버텨야 할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사랑마저 사치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가족'이 있었을 뿐이다.


사실 '가족'을 앞세운 것 역시 살고자 하는 본능적 몸부림의 한 가지였다. 망해가는 나라의 약한 백성들은 두들기기만 하는 운명의 폭력 앞에서 뭉치는 것밖에 더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가장 작은 버팀목의 단위는 바로 '가족'이었다. 거창해 보이는 신의 뜻도, 어차피 이뤄질 일은 이뤄지게 마련이라는 운명적 결정론도 눈앞의 내 가족, 그 존재 앞에서는 없는 희망이라도 박박 긁어내야 하는 가장 현실적인 목표일 뿐이었다. 일본으로 떠난 수많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손가락질받으며 살았던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멸시와 배척은 강물이 시간을 몇 번이나 휩쓸고 지나갈 동안에도 견고하게 그들을 옥죄었다. 조상들을 잉태했던 조국에서도, 그들이 조국이라 믿었던 지금의 나라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이방인이고 경계인이며 중간인이다.


#2. 파친코, 인생. 여전한 이어짐


(모자수는)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모자수는) 고정돼 보이지만 무작위성과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파친코를 왜 손님들이 계속 찾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삶은 늘 고달프지만, 그래도 게임은 계속해야지.
(파친코2, p.80/p.210)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중략)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파친코2, p.254)


거칠게 버티는 인생은 마치 파친코를 닮았다. 조정은 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이끌리듯 찾게 되는 곳이 바로 파친코다. '혹시나' 하는 행운과 희망을 품고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소위 '정상'이라 믿는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조롱과 멸시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묻는다. 과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 과연 당신들은 있는가.


정해져 있는 것만 같은 인생의 굴레에서 불확실성은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이다. 수많은 불행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안갯속에서 몇 안될지 모를 희망을 찾고 꿈을 꾼다. 그게 잘못인가. 그마저 없다면... 과연 인생에 있어 진정한 버팀목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어쩔 수 없는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삶 아니던가.


희망을 가져라, 이길지 모른다... 그 욕망이 점철된 곳이 파친코다. 물론 대부분의 욕망은 허무한 결말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컬어 '희망 고문'이라 칭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이 단어가 헛된 구호, 실패에 대한 그럴싸한 포장, 성공한 사람이나 성공하려는 사람이 달콤한 말로 누군가의 노력과 의지를 달콤하게 꾀어내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불확실한 희망마저 없다면, 버티기 쉽지 않다. 어쩌면 종교도 파친코와 다를 바 없다. 불확실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경계인이며 중간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파친코는 인생 그 자체이자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굴레다. 동시에 희망이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배타적 공격을 버텨줄 수 있는 방패이자 뿌리다. 그러니 잊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그곳에, 우리가 있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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