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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May 23. 2024

코딱지 만한 아몬드의 세상, 포기할 텐가

아몬드(손원평, 창비, 2017)

태양 빛을 잔뜩 머금어 은은한 갈색빛이 도는
캘리포니아산 아몬드. (p.25)

캘리포니아~ 아몬드~ 영양 많은~ 알카리성~

블루~ 블루 다이아몬드~ 고소한 맛~ 아몬드~

블루~ 블루 다이아몬드~


tvN 예능 프로그램인 '어쩌다 사장'에서 출연자 윤경호가 흥을 돋우며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아... 이러면 세대가 탄로 나는 것인데... 하면서도 1988년에 광고계를 휩쓴(?) 이 멜로디와 가사에 슬며시 마음이 뺏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고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캘리포니아산 아몬드가 여러 아몬드 중에서도 최고라고 생각했다. 눈부시게 맑고 강렬한 캘리포니아의 햇빛을 잔뜩 머금은 아몬드. 그 녀석을 입에 하나 넣고(여러 개면 감흥이 줄어드니 꼭 아몬드는 한 번에 하나씩만) 요리조리 굴리다가 와그작 씹으면 한번 가보지도 않은 이국의 햇살이 온몸을 훑으며 퍼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웃음이 아무 거리낌도 없이 흘러나오던 때가 있었는데... 싶다. 몸과 마음은 커진 것 같은데 내 아몬드는 그냥 그때 그 크기인 모양이다. 아니, 더 작아지지 않았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학습된 가면을 얼굴에 띄워야 할 일이 늘어나고 무의식 중에 본모습을 들킬까 두려워지는 경우도 많아진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 자체의 아몬드도 코딱지 만해졌다.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비극에 둔감해지고 희극도 감흥이 없어진다. 더 시끄러워지고 더 화려해지는데 그림자는 더 짙게 드리워지고 소설 속 주인공(윤재)보다 더 무표정한 사회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만 같다.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68)


우리는 너무 쉽게 '정상'을 규정한다. 물론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어느 시대나 사회를 훑어봐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구분은 일정 부분 존재해 왔다. 그리고 교육은 '정상'화된 표준을 가르침으로써 사회와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면에서는 일정 부분 '정상'에서 벗어난 '비정상'이 있어야 그 사회나 집단의 발전이나 개선이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보편적 일반화'가 빠르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사회를 지배한다. 이견이 있더라도 표준화된 정답을 따라야 하고 도저히 따르기 어려우면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다. 세상에도 편도체(아몬드)가 있다면 그 크기는 윤재의 그것보다도 작을 것 같다. 감정 표현 불능 사회, 마비 사회 수준이다.


표준화되거나 학습된 감정적 반응을 할 수 없는 윤재보다 오히려 윤재를 둘러싼 어른들, 그리고 그 어른들이 만들어낸 '방황하는 영혼'(곤이와 같은)들이 오히려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다. 정해진 답을 강요하는 사회, 그 답 이외에 대한 포용을 잃어버린 사회. 편도체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너랑 나랑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 / 그럴 거야. 어떤 방향이든. 그게 인생이니까. (p.134)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p.228)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며 산다. 하지만 세상에 정해진 답이란 없다. '꿈'마저 정해져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단언컨대 아름다울 수 없다.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가는 게 우리의 삶이고 현실이다.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으면 또 어떤가. 그 또한 삶이고 인생이다. 밀어붙이지 말자. 손가락질받는 '괴물'도 어차피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다. 우리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저 괴물로만 여길 것인가. 그 모습은 그저 나비가 되기 직전의 번데기나 애벌레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포기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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