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문예출판사, 2022)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믿을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쪽도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아 겉으로는 전혀 표가 나지 않고 서로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기막히게 완벽한, 그야말로 결백하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들이 인간 생활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수기 중에서)
나는 또다시 경박하고 가식적인 '우스운 배우'로 되돌아온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두 번째 수기 중에서)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 (중략)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세 번째 수기 중에서)
한 인간이 있다.
일찌감치 세상이 '상식'과 '합리'라는 가면을 쓴 위선의 공간임을 알아채 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피에로가 되기로 결심했다. 두려움을 숨기고 스스로 우스운 배우가 되기로 한 것인데 그 얇은 가면은 연약하고 조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들통날 때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둠 속으로, 비합법의 도피처를 찾아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항하기보다 회피하려 했고 버티기보다 숨어보려 했던 그의 인생은 결국 비극적 결말에 다다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단 하나의 진리로 깨우쳐 붙잡고 있는 것은 짧은 세상,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운명론적 체념이었다.
소설은 묻는다. 이게 그저 예외적인 광인에 해당하는 이야기인가. 광인이 아니면 그것은 정상인인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위선과 잔혹함으로 무장하고 살아가는 게 정상인이라면 과연 그 반대편에서 도망 다니기 바쁜 순수는 그저 광인으로, 겁쟁이로, 실패자로 치부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주인공 요조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년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을 걸쳐 알게 되는 세상의 민낯을 짧게, 압축적으로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넙치(요조의 대리 보호자지만 자신의 이익만 판단해서 움직이는 캐릭터)인 동시에 호리키(친구라는 이름으로 요조를 이용하기 바쁜 캐릭터)이며 또한 요조 그 자체다. 우리는 요조처럼 되지 않기 위해 넙치가, 호리키가 되어 찰나인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소설은 요조의 3개 수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분에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 요조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고 글을 쓴 저자로 보인다. 제삼자의 시선에서 요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시선이 실제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인지, 요조의 시선이 다자이 오사무인지에 대해 엇갈리는 견해가 존재한다고도 한다. 물론 양쪽 모두 글쓴이의 시선이라고 본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요조가 분명 닮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싶었던 글쓴이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회한이었을까, 아니면 체념이었을까.
순수는 가면을 쓰도록 강요받는다. 정상인지 아닌 지의 판단은 세상의 몫이지, 스스로의 몫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다. 직전에 읽은 '아몬드'가 연상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은 '적응'이라는 기준으로 교육을 강요하고 어쩔 수 없음을 강제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은 격리되거나 제거되는 게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날이 갈수록 이것이냐, 저것이냐 강요하는 세상의 모습이 견고해지고 있다. 중간이 없고 넓은 포용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순수가 설 자리는 있을까.
요조의 겁먹은 순수가 내 안에서도 꿈틀거리는 것 같아 두렵다. 또 가면을 써야 하나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