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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29.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1)

예측하지 못한 일이 나의 뻔한 정적을 깨트리는 것은 부담스럽다. 별 일 없이 여유롭고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피부의 솜털 한 끝까지도 불안한 잡념과 몽상이 스며있다.


마구 뒤엉킨 얇은 털실을 한 올 한 올 온전하게 풀어내는 작업에 열중해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난데없이 반갑다며 양쪽 어깨를 덥석 붙들고 거칠게 흔드는 셈이다.


그러나 순간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충격으로 부서진 일상의 귀퉁이가 반드시 나쁜 일이 일어날 전조인 것은 아니다. 그날도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강한 햇살이 들이치고, 네가 예고 없이 나타났을 때.


네 머리는 짙은 갈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언뜻 부유한 금발인 듯 보였다. 잔머리 한 올까지 모두 해를 머금고 있었다.


생동감 있는 디테일이 좋았다. 커다란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갔을 때였다. 헤엄쳐 나가며 잠깐씩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내비치는 커다란 물고기를 만났다. 촉촉한 몸뚱이의 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에 감탄하던 그때, 수면에서 부서지는 빛마저도 영롱한 윤슬이 되더라. 빠르게 물살을 가르던 배를, 지지 않고 추격하여 추월해 버렸다.




그 시절 우리는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 떠 있는 크고 흰 구름을 바라보며 지냈다. 명화 속에서나 보던 바닷가의 작은 집.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향해 놓인 비치 체어와 네가 좋아하는 모닥불을 피우는 공간이 있었다.


분명 마을이었지만 밀도가 낮고 주변에 기척이라곤 없어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집 안팎을 돌아다녀도 상관없었다. 둘 다 점잖은 척하는 대도시 출신이라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파도조차 잔잔하게 반복될 뿐인 그곳에 변화라고 해봐야, 가끔 평소와 다른 생김새의 새가 날아오는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 할 일도 없는 곳에서 나는 무척이나 바쁘게 지냈다. 비치 체어에 가만히 누운 채, 한 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너를 관찰하며 머릿속을 망상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갔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너는 불을 지폈고, 나는 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긴장할 필요 없는 시간으로 꽉 채워진 매일이 좋았다. 놀랄 일이 없으니 놀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설령 두려움으로 숨이 가빠질 일이 생기더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안심이었다.


언제나 다정한 너는 심지어 등 뒤에서 불시에 나타날 때조차 친절했다. 모든 것이 흡족하여, 한 가지의 궁금증이 계속해서 목덜미를 찔러대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바닷가에서의 생활은 내가 상상하던 최고의 나날들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보다 화려한 상상을 했다. 뉴욕 맨해튼 펜트하우스 발코니에서 샴페인 한 잔 들고 내려다보는 야경이라던가, 오스트리아 잘츠감마고트, 선착장이 딸려 있는 그림 같은 호숫가의 집이라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 없이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 무엇 하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막연하게 상상하던 "최고"의 나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사실 그렇다. 본 적도 없는 삶, 가질 일도 없는 삶.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대충 좋을 것이라 믿고 최고라는 딱지를 붙여놓은 허구적 허영. 온몸의 살갗을 뚫리지 않는 공기막으로 고요하게 감싸놓아야 겨우 마음을 놓는 주제에, 번쩍거리는 대도시의 불빛 아래 매혹적인 레몬 나무를 꿈꾸다니.  


너는 어땠을까? 난 이 질문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애써 떨쳐버렸다. 네 입에서 나올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할머니 장롱 속 수상한 사탕통 같은 거랄까. 어쩌면 맛있는 사탕이 들어있을 테고, 어쩌면 다 눅눅해져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오래된 먹거리가 들어있을 터였다.


맛있는 사탕일 가능성을 차라리 포기해야 했을 만큼, 고리타분하고 퀴퀴한 내용물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상상으로 악당을 키운 셈이다.




저녁노을로 풍경이 발갛게 물들 시간이 다가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힙한 로우파이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알지도 못하는 음악인데도, 마치 가장 좋아하는 걸 듣고 있는 양 마음을 연기하여 감성을 쌓아 올렸다.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내가 만든 작은 영화, 그 속에서 나는 잘 태닝 된 할리우드 모델 같은 몸매를 뽐내며 비치 체어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주홍빛 태양이 내 몸을 붉게 물들였고, 일몰과 함께 마치 나는 타들어가 재가 되는 듯 보였다. 갈매기떼가 상공을 노래하듯 날고, 어둠이 깔릴수록 파도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렇게 파도가 음악도 삼켜버릴 때쯤 나는 잠이 들었고, 볼품없이 일어나니 너는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나 혼자였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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