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Nov 28.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6)

자연스럽게 내 시야를 가득 채운 네 얼굴이 어쩐지 머쓱하여 뒤로 물러났다. 이불에 돌돌 말린 채 침대 가장자리에 최대한 붙어 너를 바라보았다. 암막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교묘하게 너의 눈을 비켜갔다. 아직 잠들어있는지, 깨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뒤척임에도 미동이 없었으니, 아직 자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이런 아침을 십 년쯤 맞이했던 것처럼 익숙했다. 내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익숙하다니.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 일어나서 매일같이 커피를 끓여 함께 마신다면 완벽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끝끝내 포기했던 커피 머신이 다시금 눈에 아른거렸다. 역시 그냥 사버렸어야 했나. 


몇 마디 통상적인 대화도 싫어서 피해 다녔던 너다. 어째서 이렇게 순식간에,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불안이 몰려왔다. 너는 과연 깨어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슨 말을 던질까? 


만약 내 눈을 피하며 이 방을 홀로 나선다면, 그 슬픔과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괜찮아.'라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렸지만, 이래서 영화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대답을 듣고 감당할 수 없으니, 대답을 못하게 죽여버리는 거다. 


상상만으로도 울어버렸다. 




정적을 깨기 싫어 먹먹하게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도로 넣어 내 목구멍으로 넘겼다. 눈물은 그치지를 않고 호흡이 가빠졌다. 아직 너는 살아있는데,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았는데, 이미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나의 실체 없고 이기적인 두려움이 네 목을 졸라, 너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렸다. 


내 손으로 숨통을 끊은 너를 보며 우는 것과, 잠에서 깨어난 너에게 버려져 우는 것. 어느 쪽이 더 슬픈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무엇을 상상해도 숨쉬기만 더 어려웠다. 혼미해졌다. 죽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인 걸까 생각하며, 어쩐지 다행이다 안도하며, 몽롱하게 눈을 감았다. 순간 시체처럼 차가운 네 손이 내 얼굴을 감싸더니,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맞췄다.  




네 손은 의외로 차가웠고, 입술은 의외로 따뜻했다. 돌이켜보면 너의 몸은 시시각각 부위마다 온도가 달라서 내가 자주 놀려대곤 했다. 온몸이 전기장판처럼 따뜻한데 코만 차갑기도 했고, 반대로 온몸이 싸늘한데 손만 따뜻하기도 했다. 나의 온도는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너의 냉랭함이 나를 만나 따뜻해지는 것에 묘한 보람을 느꼈고, 너의 따뜻함이 나를 데우는 것은 귀한 행복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사흘간, 너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내 옆에 있었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운 채로 보냈다. 시도 때도 없이 끌어안고 폭발하는 행성이었고 구구절절 유치한 사랑의 시구가 별먼지가 되어 소복이 쌓였다. 


잡학다식한 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유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정작 기억에 남은 내용은 하나도 없다. 그냥 네가 하는 말을 듣는 게 좋았다. 애완동물처럼 너를 온종일 멍하니 관찰했다.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마를 일이 없었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도 이렇게 되어 비로소 편안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살기 위한 규칙적인 발버둥이 의미를 잃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완벽하게 자유로운 순간이 아닐까. 나는 너와 있는 것으로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지는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이 있기에 존재한다고들 한다. 행복이 일상에 잡아먹힐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3일은 3초처럼 흘렀다. 동시에 넌 수십 년을 함께한 듯 나의 일부가 되었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쌓아 놓은 튼튼한 성벽 안에는 흔한 칼 한 자루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성문을 열고 들어온 너는 나의 성을 손쉽게 점령했다. 그리고는 말한다. "내일은 가봐야 해요. 이젠 출근해야 하니까." 


나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그 눈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출근해야 하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다. 남들도 나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게 아니다. 본인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당연하다. 남들도 나처럼 텅 빈 방같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또 울어버렸다. 집을 두 쪽으로 가를 기세로. 나는 참 잘 울더라. 정말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