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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Dec 17.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8)

그때만큼 당황한 표정을 본 적은 또 없다. 좀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너였기에, 당황한 기색조차 마음을 억누르기 위한 연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상처받았을 테고, 화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칼을 꽂은 것이 나였다. 죄책감까지 온전히 떠안을 만큼 의로운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나의 뾰족한 문장에서 진짜 속내를 눈치채어 주기를 원했다. 말하지 않은 내 마음을 몇 번 알아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날의 나는 굳이 더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며 너를 시험하려 들고 있었다. 시험의 목적이 뭘까? 대답에 따라서 내 마음이 변할 것도 아니면서. 


결국 나는 '너도 별 다를 것 없구나.'를 강제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에게 굳이 꽂은 칼을 뽑아 나에게 찔러 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를 망가트리는 것과 동시에, '역시 나는 혼자인 게 어울려.', 혹은 '불행한 편이 마음 편해.'라고 결론짓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 그 조차 위선적인 자기 방어다. 사실은 꿈과 열정을 모두 버리고 나를 선택해 주기를 바란 거면서, 선택받지 못할 것임을 알아 직접적으로 묻지 못하는. 그렇다고 또 포기도 못하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할 말을 내뱉어버리는. 불쌍한 척 하지만 비열한 나였다. 




늦었으니 그냥 자고 가라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너의 배려도 한사코 거절하고,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걷는 내내 주변 풍경은 흐리멍덩하고 가로등이 모두 고장 난 듯 어둠이 깊었다. 그로부터 계속 집에 머물렀다. 그저 방에 처박혀 있었다. 배고프면 적당히 부엌을 뒤져 땅콩 같은 걸 주워 먹고, 목마르면 맥주캔을 땄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내가 아닌 것은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딱히 네 생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잡다한 과거의 기억도 스쳐갔고, 뜬금없이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기도 했고, 인터넷에서 웃기는 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런저런 망상도 차고 넘쳤다. 혼자인 시간이 전부였는데, 이젠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어색했다. 동시에 편안했다. 너를 형체도 없는 것에 빼앗긴 채 바라보는 시간이 그만큼 불편하고 싫었던 거다.  


바쁜 너의 일상에 스며 있던 나는 매일같이 행복했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땐 역시 난 가구나 액세서리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너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일이라던가, 열정을 쏟는 취미라던가... 꿈이라던가. 




일주일쯤 지났을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여느 때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너와 처음 맞은 아침과 닮았다 느꼈다. 좋은 기억밖에 없던 3일. 반짝이던 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그놈의 금요일이다. 올라간 입꼬리를 서둘러 치우고 땅으로 꺼지듯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삐르르르르르" 


몇 번 더 울렸지만 숨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침대에서 움직일 기력도 없었고, 혹여 너라면 곤란하다 생각했다. 아니, 사실 또 모를 일이었다. 아침에 생각난 네 모습이 눈에 밟혔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간 생각의 실타래가 너무도 복잡하게 엉켜버려, 네가 보고 싶은 것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죠? 괜찮아? 진짜 걱정되니까 괜찮다고 문자라도 줘요. 아니 살아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정말로 너였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한 번에 세 번씩. 탕탕탕. 




소리가 언뜻 멈추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이웃집에서 무슨 일인지 보러 나온 것이었다. 네가 이웃에게 내 근황을 묻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알 턱이 없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시 문을 두들기기 전에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대응해야 좋은지. 


내심, 시간이 며칠 흐르면 너는 당연히 나를 털어버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게 편한 것도 있었지만,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너의 한 주는 내가 없이도 가득 채워지니까. 그런데 나를 걱정하여 목요일도 아닌 금요일에 이곳에 찾아오다니.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여전히 물어볼 용기는 없음에도.  


영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현관을 향했다. 너는 또 문을 두드렸고, 나는 문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네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긴 팔에 휘감겼다. 너는 있는 힘껏 나를 안아 밀착시켰다. 싫다고 해야 하는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호응을 해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사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오래되어 속이 꺼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아무 반응도 없는 나를 안고, 너는 마치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한 사람처럼 대성통곡을 했다. 아직 반쯤 열려있는 문틈 사이, 안도 밖도 아닌 곳에서, 귀가 멍멍하도록 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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