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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Dec 30.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9)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그렇게 또 3일을 우리는 함께 있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너를 보니 배가 고파져서, 배달 음식을 시켰다. 커다란 피자 두 판에 치킨윙 20개, 둘이 모두 해치워버렸다. 속이 든든하니 기운도 올라왔다. "맛있어요?", "휴지 갖다 줘요?", "더 먹고 싶은 건?" - 끝도 없이 자잘한 질문을 던지는 다정한 너에게 조금씩 대답하다 보니, 주눅 들어 퉁명스럽던 대답도 점차 장난 섞인 웃음이 되었다. 


반드시 물어보려고 했었다. 왜 왔는지, 그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너에게서 창작거리를 빼앗는 것은, 장기를 떼어내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야기를 하다 크게 싸우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너에게 상처가 될 말을 퍼부어 너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오갈 곳 없는 네가 꺼낸 칼에 찔려 쓰러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겨우 뱉어낸 한 마디는 생각과 전혀 달랐다. 


"미안해."


미안했다. 너무 미안하여 서글펐다. 아직도 빼앗고 싶으면서. 아무것도 포기할 마음이 없으면서. 너의 서러운 울음소리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선인장의 가시가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그 마음을 들켰던 걸까, 너는 대답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어도 넌 말해주지 않았다. 3일을 나와 보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너도 딱히 답은 없겠지 싶었다. 내게 내어준 시간은 너의 사랑, 성의의 표현인 것을 안다. 이번주에는 3일을 내게 쓸 수 있었지만, 계속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을 만큼 집에서 너와 맞는 햇볕이 좋았다. 네가 먹여주는 방울토마토가 달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어도, 이만큼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은 것 아닐까 생각했다. 한 가지가 영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어디 근사한 식당에 가서 멋진 야경과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없고, 해외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에 간 적도 없다. 하다못해 그 흔한 놀이동산이나 교외의 작은 섬 같은 곳도 못 가봤다. 그런 데이트를 원한 적도 없다. 함께 있는 걸로 너무나도 충분하여 그랬다. 너와 함께라면 내가 싫어하는 샐러드 속 브로콜리도 마법에 걸린 요정이었고, 마시지 않는 싸구려 오렌지 주스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런 지저분한 방, 부엌에 커피 머신도 없는 멋없는 집이 우리의 끝이라면? 화려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소박하고 무성의해야 하나? 


네 배 위에 머리를 올리고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을 수십 가지의 다른 버전으로 상상했다. 서로 질척대면 곤란하겠지만 너무 냉랭하게 돌아서는 것도 싫었다. 그 중간 어느 곳에 꼭 맞아들도록, 아무 미련 없는 멋진 청춘영화의 끝장면이 되도록, 우리의 마지막을 섬세하게 디렉팅 했다. 


아무리 다듬어도, 무대가 변하지를 않아 완벽하지 못했다. 이 집에서 어떻게 널 내보낸들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대다. 환경이 문제다. 이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분명 그렇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날 좀 보라며 너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마침 너도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우린 동시에 서로에게 외쳤다. 


"여행 가자!" - "같이 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웃고 나서 네가 횡설수설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여행이요. 그렇죠. 갑자기 같이 살기 전에,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오고.. 아니 근데 우리 여행 가서 나갈 진도는 이미 다 나간 거 같은데... 주로 집에서 보니까 함께일 땐 같이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집만 괜히 두 채고. 하나로 하면 월세도 덜 나갈 테고 생활비도 줄을 거고. 커피 머신도 두 개나 생긴다고요...?" 


어디서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네가 마냥 귀여웠다. 뭐라 말이 없자 당황한 목소리로 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예 같이 살면... 내가 어.. 다른 일을.. 좀 해도.. 기분이 좀 낫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남의 집에서 불편하고 심심하면... 초대받지 못한 기분도 들고 그럴 수 있지만, 자신의 집이면 또 나름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할 테고 그러니까..." 


역시 너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에 엄청난 제안을 해버리는 거구나. 일리는 있다. 역시 넌 나보다 논리적이고 긍정적이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는 동안, 넌 모든 것을 가지려 했다.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상상하지 못한 전개에 나의 알량한 논리는 마비되어 버렸다. 너는 마치 먹어서는 안 되는 과자를 먹은 것이 들통난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왜 그래. 


혼자가 편한 나다. 누군가와 함께 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릴 적엔 그런 꿈을 꾼 적도 있겠지. 가족이 생기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사회화 과정 내내 지속적으로 '누구나 해야 하는 일'로 주입되니까. 최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주며 반드시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니까.  


사회의 지독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들어질 뿐이었다. 불합리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삶의 끝에 혼자 남기 싫은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하여 통제하기 쉬운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만 남았다. 필요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너와 있는 것은 대체제가 없는 행복이다. 그러니 같이 사는 게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정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면 어색해도 운명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지 않나? 손을 꼭 잡고 미지의 도로를 내달리다 서로의 손을 놓는 순간은 언제일까. 손을 슬며시 놓은 채 계속 직진 도로를 함께 달리게 될까 아니면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 서로의 손을 뿌리치게 될까.  


언젠가 또 오늘처럼 마지막을 상상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나는 또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될 것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내면의 드라마를 다시 한번 재생하고도 결국엔 소박한 끝이 억울하다는 마음이 든다면... 


어차피 다 미친 짓이다. 네가 끼는 일이 다 그렇다. 미친 제안을 해 보자. 


"여행 가서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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