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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Jan 13. 2024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10)

그날 이후 한 동안 우리는 꽤나 부산스럽게 지냈다. 어딜 가서 살면 좋을지부터 어떻게 가야 하는지까지.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귀찮은 일을 일부러 만들다니,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는 도무지 열리지 않을 문을 열었다. 감정의 열쇠는 두 가지다. 사랑 혹은 증오. 우리는 사랑의 열쇠를 사용했다. 또 한 번 이 문을 열게 되는 날, 증오의 열쇠를 집어 들지 않길 바라며. 


너에게 물었다. "유명한 도시로 가고 싶어 아니면 멋진 자연환경이 더 좋아?" 


한참을 고민하더니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조용한 자연 속 시골이 창작활동에도 좋고 일도 편할 것 같지만, 도시가 아무래도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며. 


"요즘엔 다 온라인이니까, 네가 일하기 좋은 곳에서 일하고 기회는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게 어떨까? 가격도 더 좋을 것 같고. 필요할 땐 도시에도 나갈 수 있게 너무 외지지 않은 곳으로 한 번 찾아보자." 


결정 장애가 있는 너를 만나니, 평생을 결정 장애로 살아온 내가 야무지게 많은 결정을 내렸다. 비록 세상은 절대 평가를 하고 싶어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나 성향은 절대적 가치로 수치화할 수 없더라. 온종일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만 흘려보내던 나도, 너에게 이것저것 꽤 쓸모가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사는 집의 계약이 끝날 무렵에 맞추어, 내 집을 세를 주었다. 대도시에서 차로 2시간 반경을 샅샅이 뒤져, 사람이 적어 공해도 적은 작은 바닷가 마을, 장기 숙박이 가능한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해처럼 빨간 지붕이 눈에 띄는 것을 제외하면 흔한 시골 주택이었지만, 뒷마당과 이어져 있는 작은 서쪽 해변이 교묘하게 우리만의 작은 바다가 되었다. 한눈에 반했다. 



 

이야기에 앞서 회상했듯, 영화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큰 유리창 앞 테이블에 앉아 네가 내려주는 커피를 함께 마셨다. 일이 적은 낮에는 종종 보트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가 대단한 피겨 스케이터라도 된 양 수면을 애무했다. 하루를 마감할 때면, '스파이시 골든 오렌지 라테'를 꼭 닮은 해 질 녘 바닷가에서 매일같이 그 첫 한 모금을 마셨다. 어둠에 먹혀 재가 될 때까지. 


너는 여전히 바빴지만, 네가 옳았다. 함께 지내니 이전보다 너의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웠다. 너와 있을 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를 보고 있는 시간이 나의 일상 속 여가가 되었고, 네가 보이지 않는 시간 역시 너와 함께인 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집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너는 또 다른 카페일을 했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네가, 내 호흡에 켜켜이 박혔다. 




짐을 줄인다고 줄였지만, 정신없는 이사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박스에 넣어 온 것들이 있었다. 5년 전쯤 구입한 손잡이가 부서진 머그컵이라던가, 쓰다 남은 비누 같은 것. 그리고.. 네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게 한 책.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베스트셀러, <제로버스>. 


조용한 바닷가에서 망상도 지겨울 때쯤이면 주로 유튜브 영상이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이 책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조금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독서하는 내 모습이 처음인 너는, 방해하지 않으려 먼발치에 머물면서도 신기해 죽겠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굴리며 바라보더라. 


책을 읽는 게 버릇이 되지 않았다 보니 서너 페이지 읽다 잠들거나 딴짓에 눈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꾸준히 계속 읽어나갔던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다시 책장을 펼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는 역시 팔리는 이유가 있다. 


숫자 제로(0) 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 이름이었다. 제로는 사람이자 세계였다. 지구에서 무소속으로 헤매는, 사연 많고 도전적인 영혼들을 초대하여 세계를 확장한다. 나만큼이나 망상에 능한 자가, 자신의 모든 망상을 글로 풀어 책으로 엮었다. 


나도 머릿속에만 남길 것이 아니라 이제 좀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는 공책을 좀 달라고 네게 졸랐다. 너와 같은 글쟁이가 되어 보려는 나를 보며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걸 보니 좀 멋쩍어졌지만. 


"여기서 더 지내다 보면 이제 그림도 그리겠는데요?" 라며 네가 빈 캔버스를 가리켰다. 


나는 "하, 미쳤나 봐. 싫어..."라고 대답했지만, 해변에 이젤을 펴고 무아지경으로 예술세계에 빠져드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뭐, 언젠간 시도해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옅게 포갰다. 




매일 같지만 다른 하루의 속력은, 잔잔했다 거칠기를 반복하는 바다의 물살을 닮아 있었다. 지지부진한 책장 넘기는 속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제로버스의 서사도 클라이맥스를 넘기고 결말을 향해가고 있었으니.  


결말이 너무 궁금한데 진도는 좀처럼 안 나가니, 너에게 결말을 미리 말해 달라고 자꾸 졸랐다. 너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기억이 정확히 안 난다는 말로 나의 공격을 빠져나가며, 내가 책을 팽개치면 집어다가 조금씩 다시 읽곤 했을 뿐. 끝을 알고 나면 나는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완독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빨리 읽어버리려니 또 아쉬웠다. 원하는 결말이 아닐까 봐 슬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 나는 점점 더 느려졌고, 일평생 첫 장편 완독의 날은 자꾸만 늦춰졌다. 다시 읽기 시작한 네가 나를 거의 따라잡도록 내버려 둔 채였다. 빨리 끝내라며 재촉하니 어쩐지 더 읽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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