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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Jul 21. 2023

생성과 소멸의 순간

영화[언더 더 스킨] 리뷰


개봉: 2013년

감독: 조나단 글레이져

출연: 스칼렛 요한슨(로라)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로 올라간 검은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고 그 바람 속으로 흰 눈이 내려올 때, 모든 것이 끝난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사라진 것처럼 생각되는 로라의 신체는, 그 연기를 머금은 채 흩날리는 눈의 모습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내려앉는다. 상승하는 검은 연기의 이미지와 하강하는 흰 눈의 이미지는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한 존재의 소멸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한 외계 생명체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일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우리가 봤던 장면은 한 생명이 창조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어 부피를 넓혀가는 빛의 형상, 그리고 완벽한 구의 형상을 뚫고 들어가는 그 빛나는 점의 모습은 마치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같다. 



처음 지구에 도착한 로라는 다른 사람의 옷을 벗겨서 그대로 입는다. 이곳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그 순간에 부여받는 것이다. 영혼 없는 표정으로 사냥감을 물색하던 로라는 그저 껍데기(스킨)만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 없이 정해진 순서대로 일을 행한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도 감정도 없는 것 같다. 남자들을 향해 웃는 그녀의 표정은 감정의 공유라기보다는 사냥감을 끌어들이기 위한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여러 사람을 만난 뒤로 조금씩 달라진다. 사냥을 위해 혼자 있는 남자들만 바라보던 로라가, 다른 여성들을 인식한 순간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의 이미지가 그녀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고, 각각의 여성의 개별성이 인식된다.  이 장면은 관찰을 통해서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타인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순간인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에 관심을 갖는다. 로라에게 유혹당한 남자들이 빠져들어가는 검은색 타르 같은 바닥은 마치 거울처럼 그들의 모습을 비춘다. 바닥에 비친 로라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보이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녀는 겉모습과 상관없이 외계인으로써의 자아만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즉 그녀의 스킨(피부)은 그녀와 일체의 존재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쉽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섬유종을 가진 남자를 끌어들인 밤, 남자가 타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난 뒤 로라는 인간의 스킨 속에 감춰진 자신의 원래 모습을 인식한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그동안 도구로만 사용해 왔던 로라의 얼굴이다. 그녀는 거울 속 얼굴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응시한다. 이 순간 외계인으로만 존재하던 그녀는 처음으로 다른 생명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창문 앞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앵앵거리는 파리의 욕구를 파악하고 문을 열어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전날 밤 그녀가 사냥했던 남자를 풀어준다. 



사냥의 의무로부터 도망친 로라가 마주한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갯속이다. 안개로 가득 찬 공간은 방향을 잃게 만든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순간 놓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놓은 그 순간이 바로 다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순간이다. 로라는 지금까지 도구로만 사용해 왔던 자신의 스킨을 다르게 대하기로 결정한다. 본체와 스킨으로 분리하여 인식되었던 신체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침실의 거울로 새롭게 인식한 자신의 신체를 자세히 관찰한다. 



인간이자 여성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한 그 순간 그녀의 세상은 뒤집어진다. 외계인으로 존재할 때는 단지 사냥의 대상일 뿐이었던 남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인식한 후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숲에 홀로 버려져 휘둘리는 것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강간범에게 뒤쫓기다 결국 인간의 외피마저 벗겨진다. 스킨이 벗겨진 본체의 검은 얼굴은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수행하던 이전의 로라의 모습처럼 무표정하지만, 벗겨진 스킨의 로라는 슬픈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외계인은 이제 자신의 것이 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벗겨진 외피의 로라는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든 벗겨질 수 있는 분리 가능한 그녀의 스킨은 이제 뜨거운 불 속에서 녹아내려 본체와 하나가 된다. 정신적으로 하나의 존재로 합쳐진 이후 물리적으로도 하나의 존재로 합쳐지는 것이다. 




영화는 외계인을 빌어 하나의 존재가 탄생한 후 성장하여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결국 죽음에 이르러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삶의 가장 당연하면서 반복적인 생의 한 사이클을 보여주는 것 같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버리고 새롭게 찾은 자아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연기가 되어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로라는 흰 눈과 함께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눈 아래로 마치 그녀가 사냥한 남자들을 집어삼키던 타르처럼 끈적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로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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