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다음소희] 리뷰
개봉: 2023년
감독: 정주리
출연: 김시은(소희), 배두나(유진), 정회린(쭈니), 강현오(태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오랫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던 이미지는 ‘발’이었다.
한겨울에 빨갛게 꽁꽁 언 맨발로 슬리퍼를 신은 소희의 발은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추운 겨울 날씨 같은 사회에 내쳐진 어린 소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유진의 발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검은색 워커에 꽁꽁 싸매어져 있다. 경찰이라는 직업을 고려하더라도 유진은 유난히 투박하고 강해 보이는 디자인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 속에 숨겨진 그녀의 가녀린 발을 상상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가장 강하고 두꺼운 갑옷으로 꽁꽁 싸매는 행동으로 오히려 그 약점을 더 드러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밖에 없도록 가장 연약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소희의 발과 가장 강한 겉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속에 약함을 감추고 있는 유진의 발은, 그래서 어쩌면 같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 둘의 발을 위로해 주는 듯 아주 잠깐의 시간 드리운 햇빛은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꽁꽁 언 발에 잠깐이라도 온기를 내려 준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에서 온기가 서리는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갈 뿐이라는 의미일까? 어떠한 의미였는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햇빛이 드리운 시간 이후에 이어지는 소희의 자살이라는 사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 정도의 온기로는 소희의 꽁꽁 언 발을 녹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인 ‘다음 소희’는 소희가 가고 없는 세상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 다른 많은 아이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내가 ‘다음 소희’를 생각했을 때는 유진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앞서 발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였듯이 소희와 유진은 동일한 캐릭터의 다른 변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본청 내근직으로 오랫동안 근무해 왔던 유진이 어떤 이유로 현장 근무에 발령이 났는지 영화 속에서는 설명되고 있지 않다. 다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과 경찰 조직 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어렴풋이 조직과 개인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상상의 살을 붙이면 유진은 위에서 덮어두라고 했던 사건을 들 쑤셨다거나, 내부고발자의 역할을 해 미운털이 박혔지만, 그녀를 직위 해제할만한 사유가 없어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 목적으로 지방으로 발령이 난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은 콜센터 내에서 당연시하던 불합리에 반발하던 소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소희와 유진의 연관성을 자꾸만 찾아보게 된다.
유진은 단순 자살로 사건을 덮으려는 조직의 명령을 거부하고 깨어질 것이 뻔한 수사를 계속해 나간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앞서 팀장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직의 명령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소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서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던 소희처럼, 누군가는 소희의 마지막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주면서도, 결말이 빤히 보이는 그 위태로움에 또 다른 소희를 보고 있는 듯한 불안함이 떠오른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무리 소리쳐도 혼자만의 메아리가 되고 마는 유진의 모습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좌절한 소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콜센터 내의 수많은 실습생들과 마찬가지로 유진의 답답한 상황도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유진이 소희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그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차치하고 무엇인가 텅 비어버린 듯한 유진의 모습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영웅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유진은 분노하지만 그 분노가 세상을 바꿀 힘은 없다. 그저 이미 떠난 소희가 남긴 성공의 순간을 붙잡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유진이라는 ‘다음 소희’ 그리고 콜센터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 ‘소희’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소희’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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