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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Sep 06. 2021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하나 슈퍼'다

이효리 <이발소집 딸>


퇴근길 지하철에서 플레이 리스트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가수 별로 곡을 정리하다가 이효리의 <이발소집 딸>에 손가락이 멈췄다. 영화였다면 아마 그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재생되면서 퇴근 중이던 내 모습은 교복을 입은 아역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나를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노래가 몇 곡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노래는 나의 열아홉 살과 여섯 살을 기묘하게 중첩시키는 마법의 노래다.


'나는 여전히 이발소 딸이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2008년, 이 노래가 발매되었을 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열아홉. 마치 전생처럼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10여 년의 세월이 다 손틈 새로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열아홉, 나는 내가 몇 달 뒤에 자취를 시작해 독립을 하게 될 것이란 사실도,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과 아주 멀어진 채로 20대를 보낼 것이란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논술 준비를 해야 했고 매일 국어 지문 여덟 개를 풀어야 했으며 내 몫의 불안과 우울을 잘 견뎌내는 와중에도 친구들과 깔깔거리고 웃어야 하기도 했다. 불안한 현재와 막연한 미래의 중간에 서있던 열아홉, 나는 당시의 '거꾸로 해도 이효리'가 써낸 자전적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하며 흥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이발소 딸이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내 이야기로 가사를 살짝 바꿔본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나는 여전히 슈퍼 딸이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열아홉에도 서른둘에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나의 성격을 호방하게 만들면서 나의 감수성은 날카롭게 벼린 시절이 언제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나는 하나슈퍼의 딸내미, 슈퍼 이름의 주인인 하나.

후에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남자 형제가 있는 친구들 대다수가 본인의 엄마를 지칭할 때 '남자형제이름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 내심 속상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에게도 오빠가 있었지만 나는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물론 친척들이야 세상에 먼저 난 오빠 이름이 익숙했겠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에겐 삼거리에 있는 '하나슈퍼'의 딸내미가 '하나'였으므로 우리 엄마 아빠는 자연스럽게 하나엄마, 하나아빠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또래, 특히 '기 세서 못 키운다는 백말띠 여자' 애들이 겪은 그런 류의 자연스러운 차별을 덜 체화하고 자란 것은 내가 하나슈퍼의 하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나슈퍼는 나에게 단순히 슈퍼가 아니었다. 만약 나라는 사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하나슈퍼를 채색하는 색이 나의 바탕색일 것이다.


하나슈퍼는 그 시절 시골의 가게들이 대개 그렇듯 셔터를 열면 가게였고 가게 안쪽의 문을 열면 우리 네 식구가 사는 집이었다. 옆에 비어있던 가게(역시 그 집도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있었다)를 헐어 확장하기 전까지 우리 집은 가게에 딸린 단칸방이었는데 오빠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그날은 아주 행복한 날이었다. 바닥에서 안 자고 침대에서 잘 수 있으니까. 일곱살 혹은 여덟 살의 하나는 단칸방이 뭔지도 몰랐으므로 좁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지나고 난 뒤 어느 순간에 '아, 하나슈퍼가 단칸방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어렸던 그 시절의 나도 혹은 그때보다 더 자란 후에 나도 '단칸방'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책에서 배운 혹은 사람들이 말하는 단칸방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와 내 유년시절의 하나슈퍼를 연결시키지도 못했던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무언가를 골랐고, 아이들은 무언가를 졸랐으며 또 갈 때는 무언가를 들고 갔다. 가게엔 없는 것 빼곤 다 있었다. 아주 가벼운 담배부터 아주 무거운 슈퍼타이(세탁세제)까지. 가게가 허전해 보인다는 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많이 들고 갔다는 뜻이었고 가게에 물건이 가득 찬 날은 엄마가 발주를 넣은 물건이 트럭에서 내려 우리 집에 잔뜩 진열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어린 나에겐 이래도 풍족하고 저래도 풍족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학교에 갈 때 껌이든 과자든 아이스크림이든 원하는 걸 물고 갈 수 있는 '슈퍼집 딸의 특권'이 있었으므로 등굣길마다 부러움을 한눈에 받는 것은 당연했다. 새로 나온 과자도 텔레비전에서 선전 (tv 광고라는 말과는 느낌이 다르다)하는 아이스크림도 내가 동네에서 가장 처음 먹어보는 사람임도 두 말할 필요 없었다. 이러니, 나는 내가 비참하다거나 가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던 게 당연한 것이었다.


또 하나슈퍼는 군의 면, 또 그중에 '리' 행정구역에 속해있었지만 삼거리에 있었던 데다 바로 옆엔 우체국, 맞은편엔 소방서가 있어서 실제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오고 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늘 우리 가게에서 수다를 떨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 집 저녁 반찬이 무엇인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동네가 정전되면 모두들 우리 집에 양초를 사러 왔고 신나게 놀다가 헤어진 친구는 엄마 심부름으로 두부나 간장을 사러 왔다. 겨울이면 호빵 기계에서 열심히 호빵을 꺼내 주어야 했으며 여름엔 가게 앞 평상에서 어르신들이 소주를 드셨기 때문에 안주 심부름 같은 걸 바지런히 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하나는 어린 나이에 비해 매우 바쁜, 4+17은 모르지만 400원 더하기 1700원은 아는, 동네 아줌마들을 졸도시키는 깜찍이 애어른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나, 물건 팔고 여기저기 참견하기 바빠 사는 게 얼마나 다채롭고 풍요로웠는지.


나는 하나슈퍼를 11살에 떠나왔다. 경기도로 이사를 오면서 처음으로 방 세 칸짜리 집에 살게 되었고 내 방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때 처음으로 외로움과 비참함을 알게 되었다. 하나슈퍼의 하나는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사였는데 그곳의 하나는 낯선 이방인, 오래된 빌라로 이사 온 시골애였으므로. 그렇다고 오래 비참해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금방 같은 빌라에 사는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외로움과 낯섦의 그 시절도 잘 지나왔다.


그런데 열아홉, 나는 이효리의 노래를 듣고 내 근원이 하나 슈퍼의 하나라는 것을 다시 깨달은 것이었다. 하나슈퍼의 근원이 하나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 하나슈퍼였다는 것을.


몇 해 전 할머니의 상을 치르느라 오랜만에 찾아 간 고향에서 하나슈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엔 특산품 판매장이 들어와 있었다. 건물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또 외관도 내관도 너무 많이 변해서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다시 지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한 20년 전쯤 여기 살았는데 안을 좀  수 있을까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슬쩍 기웃거리고만 왔다. 그래도 하나슈퍼의 자리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됐다. 내 어릴 적 사진 하나슈퍼는 그대로 남아있고 나 역시도 하나슈퍼가 만들어준 색깔이 기본 바탕색이니까. 나는 여전히 슈퍼 딸이야 시간이 가도 난 그대로. 노래 가사 그대로다.


나는 내가 늘 가벼운 우울감을 달고 살면서도 비참에는 깊이 빠지지 않는 성격으로 자란 이유가 하나슈퍼에서 자란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머쓱하고 건방진 말처럼 들리지만ㅡ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어느 부분만큼은 꼭 하나슈퍼의 하나처럼 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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