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 Oct 13. 2024

왜 살지 (※힘 빠짐 주의)

무기력형 게으른




네이버에 ‘왜 살지?’를 검색하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뜬다. 생명사랑 캠페인이란다. 어… 말은 고맙긴 한데 나는 뭐 그런 죽고 싶다거나 하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고 종종 그렇듯 그냥 무기력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엉덩이가 가려워서 긁적거리듯이 네이버에 ‘왜 살지’를 검색하곤 한다. 불현듯 현자타임이 오는 것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떠올린다. 정말로 나는 왜 사는걸까?

힘 빠지고 쓸데 없는 소리란 거 안다. 그렇지만 그렇게 소중하다는 나의 삶은 대체 어떤 목적을 위해 매일매일 연장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고찰 없이도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지만, 한 단어를 여러번 곱씹으면 게슈탈트 붕괴가 오는 것처럼 내 삶도 붙잡고 골똘이 생각하다 보면 의미가 분해되곤 한다. 여기에 대해 누군 안정을 말하기도 하고 누군 꿈을 말하기도 하고 매슬로는 자아 실현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라고 하는데 그런 보편적인 대답으로는 그리 썩 시원하게 가려움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특히 뭔가 너무 아등바등 사는 것 같다 싶으면 내 안의 현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보게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애쓰며 사는 겐가!?’

본질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솔직히 별 중요한 이유가 아니라면 좀 놓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 속마음이긴 하다. 왜냐면 세상은 나에게 너무 피곤하게 구니까. 아니 별 것도 아닌 걸로 너무 유난이다. 대부분 그렇다. 사는 데 하등 지장없는 것들로 맨날 이 사람이랑 싸우고 저 사람 눈치 보고 적응한답시고 잘 보인답시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시간이나 돈 낭비하고 헉헉… 갑자기 급발진 해서 미안하다. 아무튼 이렇게 무거운 피로감을 이고 지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좀 또렷하면 좋겠다. 그러면 현자한테 혼날 때마다 좀 덜 머쓱하겠다. 구태여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피곤한 사람 같다. 산다는 건 모르긴 몰라도 피곤한 일임은 확실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반대인 것 같다. 삶의 이유를 생각하느라 피곤해지는 게 아니라, 피곤해서 삶의 이유를 생각하게 되는 거였다. 확실히 이건 에너지가 고갈된 게 맞다. 왜냐하면 충분히 활력이 도는 때엔 이런 생각이 안 든다. 삶이 흠뻑 즐겁고 하는 일이 재미있다면 뭐하러 이유 같은 걸 캐묻겠는가. 그냥 즐기기도 바쁜데. 더 이상 쓸 에너지가 없으니 ‘피곤해 죽겠는데 이거 꼭 필요한 거야?’ 같은 걸 되뇌인다.


그러니까 무기력은 신호가 아닐까? 아무 것도 안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 쇼펜하우어도 자기혐오든 반성이든 모든 원인은 피로 때문이니,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그저 자는 것이 최고라고 말했다. 혐오스러운 오늘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라고. 얼핏 들으면 현실 도피처럼 느껴지지만 다행히 기력이란 게 다음 날 되면 일정량 리필되는 거라서 뭐가 됐든 어제보단 수월해지는 편이다. 암만 자고 일어나봤자 소용없는데 어떡하냐고? 그건 편도체나 전전두피질에 고장 난 거니까 빨리 병원 가라.


무기력증 같은 병리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외에도 분명 에너지가 자주 방전되는 사람이 있다. 날때부터 에너지 자체가 좀 부족한 타입 말이다. 그러니까 사정도 모르면서 맨날 퍼져있다고 욕할 건 아니라고 본다. 사람마다 에너지의 바닥을 느끼는 끓는 점 ‘피곤점’이 다 다를 거다. 물론 운동을 하거나 동기부여 영상 같은 걸 봐서 어느 정도 수준을 끌어올릴 순 있겠지. 그러나 그 수준이라는 게 누구의 기준이 평균이 되는 거며, 그런 생산성의 극대화 같은 게 삶의 이유라는 본질적인 대전제에 대답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피곤하면 자기혐오 하지 말고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말한 이유도 삶의 메인 이벤트를 생산성보다는 자기애에 우위를 뒀기 때문일거다. 근데 사실 나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이거 한 권 밖에 안 읽어봐서 자세히는 모른다. 서른둘 밖에 안 먹은 놈 해석은 이 정도까지인 것 같다.




그래서 왜 사느냐는 물음에 대해 내 현자랑 딥톡을 해봤는데 결국 우리가 내린 답은 ‘자유’다. 결국 이거 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거 아닌가? 경제적 자유든, 어떤 전문 분야에서의 자유감이든, 이 세상에서 최대한 제한 받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 말이다. 고작 바닥을 기어다니는 자유만 허락되었던 갓난쟁이가 세상을 자유로이 호령하게 되는 과정이 인생의 드라마 아니겠는가. <원피스>에서 루피가 해적왕 되겠다고 30년 째 고생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난 지배 같은 거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야!”

(오타쿠냐고 하지 마라. 원래 만화 대사에 명언 많다.) 나는 피 터지게 내공을 쌓아서 어떤 경지를 정복한 전문가의 삶도 자유도 높은 삶이지만, 그저 일 같은 건 요령껏 해치운 다음 이딴 잡생각이나 하며 마음껏 게으름 피우는 것도 자유도 높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최고가 되는 건 어쩌면 무척 피곤한 일이니까. 아, 그러기엔 루피는 피가 너무 많이 터졌다. 공신력 있는 예측에서는 루피가 이미 생명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서 결말엔 아마 요절하는 결말일 거라던데 나는 오래 살고 싶다. 한정된 인생을 최소한의 일을 하고 최대한으로 노는 데 쓰고 싶다. 해적왕 같은 거 안하고 가늘고 길게.





사람은 잠이 필요하다. 뇌척수액으로 뇌의 노폐물을 씻어내리는 물리작용 외에도 삶의 군데군데 쉼표를 찍는 작업이 필요하다. 창밖을 보며 멍을 때린다거나 무용한 생각들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림 그릴 때도 세심한 정밀묘사를 하다가 한번씩 눈을 흐릿하게 하고 멀리 떨어져서 봐줘야 큰 그림이 산으로 안 간다. 다시 말하지만, 빼곡한 생산성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니까.

어차피 죽어서 잘 건데 뭘 그리 많이 자느냐고? 야, 그럼 어차피 죽어서 딱딱해질 건데 벌써부터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구냐. 나 또 화내고 있네. 이게 다 피곤해서 그렇다.

유연함이 필요하다. 푹 재워야 부드러워진다. 푹 재운 애호박 무침이나 꺼내서 뭉근하게 한 끼 하고 한 숨 때려야겠다. 암냠냠.





이전 14화 어차피 그럴싸하면 그만 아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