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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12. 2024

어차피 그럴싸하면 그만 아닌가?

합리화형 게으른




비효율적인 건 딱 질색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성격이 아주 급한 편이다. 일이란 가장 적은 힘을 들이고도 가장 빠르게 끝낼 수 있어야 한다.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이게 왜 게으른 유형에 있느냐고? 그야 이 모든 계산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지. 계산을 너무 오래 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게다가 투자 대비 효율이 떨어진다 싶은 건 이미 머릿속에서 다 폐기 처분됐다. ‘어차피 해봤자 쓸모 없는 일이었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합리화한 일들이 한 트럭이다. 결국 오늘도 무엇 하나 실행에 옮기는 데 실패한다.


내가 이런 염세적인 인간이 된 것에는 다 서사가 있다. 또 무슨 자기합리화를 하려나 싶겠지만 어차피 제목부터가 합리화형 게으른인데 좀만 참고 더 들어주라.




나도 처음부터 효율만 따졌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앞뒤 재지 않고 무식하게 돌진하는 캐릭터에 가까웠다. 열정이 뜨거웠고. 그때는 그렇게 노력을 쏟아부어서 아주 압도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나중에 꼭 세바시나 Ted에 불려 나가야지. 세계 최고의- 나 유일무이한- 같은, 글로 쓰면 부끄러워지는 그런 타이틀을 잘도 입에 올렸다.


꽤나 아등바등 덤볐다고 생각했는데 좌절을 마주하는 순간이 많았다. 며칠 밤을 새워 출품한 공모전에서 보기 좋게 떨어진 일이라든가, 최선을 다해 해간 과제를 혹평 받은 일이라든가… 디자인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공개 품평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과대표를 하고 있었고 강의실엔 전부 2학년 후배들이었는데,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아프게 박혀있다. “과대야, 너 이런 퀄리티면 수업 다 나와도 F 받을 수 있어” 순간 모든 합리화가 고장 나는 기분이었다. 나 대신 압도적인 결과를 낸 사람을 훔쳐봤다. 아, 저런 사람이 1등 하는 거구나… 정신 승리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벽 같은 게 느껴졌다. 그땐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점점 괜찮아졌다. 그런 사람을 몇 번 마주치다 보니 충격마저 잠잠해졌다. 슬픈 겸손이었다. 모든 합리화를 다 동원해봐도 내가 완승을 거둘 만한 구석이 한 가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외모나 집안, 재능의 천재성, 행운 혹은 그 어떤 것에서도. 만약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내가 감독이라도 나 같은 사람한테 주인공을 시키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어차피 그럴싸하면 그만 아닌가?’

처음 시작은 반항에 가까운 가설이었다. ‘최고 지향’이라는 게 내 삶에 꼭 이롭기만 한 건 아니며 오히려 아주 뛰어나고 싶어서 생겨나는 스트레스와 강박이 나같은 게으른 부류에겐 더 독이 된다는 걸 알아차린 거다.


그럴싸의 기준은 그닥 까다롭지 않다. 아주 뛰어나진 않더라도 구색은 갖추고 있는 정도. 무리없이 납득 가능한 자신과 타인의 최소합의점. 그야말로 ‘합리적인’ 결과물 말이다. 그것이 뭐, 세상을 뒤바꾸는 데는 역부족일 수 있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데에는 1인분의 몫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것이 꽤나 합리적인 자신과의 타협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동기가 비관적이어서 그렇지, 사실 내 인생을 두고 보면 상당히 낙관적인 이야기였다. 일이라는 건 그럴싸하게 후딱 해치우고 나머지 시간은 인생을 충만하게 만드는 데 쓰자는 거다. 행복이란 걸 꼭 최고가 된다거나 아주 일을 잘하려는 데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 않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나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모인 파티에 참석해서 비싼 와인을 들이켜는 대신, 내 아들이 쓴 시를 담은 책의 표지를 디자인해줄 수 있는 아빠 정도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유명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글 쓰는 중에 이 말은 굉장히 어불성설 같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내 인생에 최고 지향 같은 건 사라졌다. 일은 그저 그럴싸한 정도로 얼른 해치워 버리기로 했다. 나머지 시간은 나 좋을 대로 써버릴 거다. 위인이 되는 건 진작 포기했고 1인분만 한다면야 사회에 폐가 되는 일도 없겠지. 그리고 나같은 조연도 좀 있어야 주인공이 더 빛나는 거 아니겠나. 그것이 세상이 나에게 정해준 주제 파악 아닐까? 와 지금 나 진짜 별로인 사람 같아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이 책 제목부터가 ‘게으른’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럴싸해지는 것도 겁나 어려운 일이라서 얼른 1인분의 어른으로 어엿해지기나 했음 좋겠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 다 쓰고 보니 거의 무슨 불온서적 같다. 아니 그러니까 이 글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같은 거다. 뭔 말인지 알겠지? 너무 열 내지 말자고. 에너지는 비축할수록 좋다. 아무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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