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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11. 2024

사람이 왜 이렇게 철이 없어요?

산만형 게으른




한동안 성인ADHD라는 병이 유행처럼 돌았다. ADHD,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이름 그대로 주의력이 결핍되어 과다한 행동을 하는 이상 상태를 말한다. 보통 아동기에 나타나다가 사라지는데 이게 성인기까지 완치가 안 되면 성인ADHD가 된다. 당연히 전염성 같은 건 없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가져다 썼을 뿐이다. ‘나 성인ADHD라 산만해’라는 식으로. 개중 진짜로 투병 중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일에 집중을 못할 때 그 이름을 빌려다가 방패를 삼았다.


이름이 붙으면 잘못이 이전된다. 그냥 정서가 불안하다든가 집중력이 약하든가 하는 식으로 설명을 늘어놓으면 내 잘못인 것 같아 보이지만, ’성인ADHD‘ 같은 이름이 붙으면 그 병의 잘못이 된다. 병만 고쳐지면 괜찮아질 거라는 잠재적인 희망도 더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사람들이 나한테 ‘사람이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요?’ 같은 소리를 안 한다. 아픈 사람한테 뭐라 하는 건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있기 때문에 이제 잘못은 나를 타박한 그 사람 몫이 된다.(개꿀) 그러니까 핑계 댈 때 웬만하면 길게 말하지 말고 이름으로 말해라. 아, 나 지금 ’원고 쓰기 싫어병‘에 걸린 것 같은데. 어떠냐. 있어보이지?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정말로 살아오며 ADHD 증상을 달고 살았다. 실제로 그 병이 있다고 진단 받은 건 아니다. 나는 정신병원에 가는 건 무섭기 때문이다. 그냥 인터넷에 있는 성인ADHD 자가진단 같은 걸 할 때마다 결과지에 나보고 병원 가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떼보면 거기에도 학년마다 꼬박꼬박 ‘주의 산만’ 같은(혹은 그걸 교묘히 돌려말한) 내용의 담임선생님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아마 내가 책상 밑으로 다리를 자주 떨었으며 수업시간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딴짓 하거나 교과서에 낙서하는 데 보냈기 때문일 거다.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덕분에 제 그림 실력이 많이 일취월장 했었습니다.


아무튼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이상하게 하나 같이 재미 대가리가 없었다.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숙제를 하는 와중에도, 그리고 커서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온갖 재미있는 것들에 눈이 휙휙 돌아갔다. 그러면 어김없이 질타를 받았다. 니가 ’애‘냐고. 그 말은 내가 애였을 때는 별 타격이 없었지만 애가 아니게 된 나이부터는 꽤나 부끄러운 일이 됐다. 자기통제력이란 ’어른‘의 필수 조건이니까. 어른은 ‘재밌는 일’ 보다 ‘해야할 일’이 우선이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해야할 일들에 써야만 한다. 재미있어야 할 때만 재미있을 수 있어야 어른이었고 아무 때나 재미있어 버리는 나는 철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일에 마음대로 집중이 안되면 슬픈 기분이 든다. 내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성인ADHD 환자들은 대부분 우울증도 함께 겪는단다. 어느 날 데드라인에 딱 맞춰 겨우 일을 마치고 우연히 내 인터넷 검색 기록을 봤는데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일과는 하나도 관련 없는 것들로 몇 페이지 씩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애매미 울음 소리 패턴’ 같은 건 왜 검색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건 딱 일이 바쁠 때만 재미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알쓸신잡’이 되는 경우도 드물다. 해야할 일까지 제쳐두고 확보한 시간을 고작 이런 걸 찾는 데 썼다는 게 슬퍼졌다.


그런데 아마 나는 시간을 되돌려도 또다른 엉뚱한 것에 빠져있을 게 분명하다. 왜냐면 너무너무 궁금하니까. 나는 궁금한 것을 발견하면 참을 수 없이 두근거린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쉽게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이를 먹는 것의 가장 큰 저주는 재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 호기심은 이 저주에 강력한 면역이 된다. 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내가 좋아하는 대사가 하나 있다.

“인생은 초콜릿 박스 같은 거라 까보기 전엔 어떤 맛인지 알 수 없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내가 이 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뒤쪽 보다는 앞쪽에 있다. 인생이 ’초콜릿 박스‘라면, 나는 금세 새로운 초콜릿이 궁금해져서 자꾸만 박스에 손을 집어넣는 꼴이다. 사람들의 철없다는 타박에도 내가 초콜릿 까는 걸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꼭 병리적 요인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이 박스가 극악 확률의 랜덤박스고 매번 거지 같은 맛이 걸린다 해도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어쨌든 단맛 아닌가. 대책 없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해도, ‘좋은 초콜릿을 신중하게 고르는’ 어른이나 ‘초콜릿 같은 영양가 없는 건 안 먹는 게 낫다’고 말해대는 어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초콜릿은 그딴 식으로 먹는 게 아니다.


쓰다 보니 할 일은 미루고 재밌는 것만 찾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보이는데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거지 신세 못 면한다. 내 말은 각자 1인분 씩만 해내고 나머지 시간은 초콜릿이나 까먹자는 말에 가깝다. 내 취향이 뭔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같은 탐구생활 말이다.




최고가 되려면 한 우물을 깊게 파야한다고 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러 우물을 조금씩 파대는 사람들은 성공과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은 좀 인식이 변한 듯 하다. 아무래도 최고가 되는건 극소수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테니까 한 우물을 판다고 해서 최고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탓하고 갇히게 된다. 그러나 얕은 우물에서는 헛디뎌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쉽게 매몰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우물을 파든 여러 우물을 파든 경험치라는 근육은 똑같이 붙는다.


한 Ted 강연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뽐내는 강연자를 본 적이 있다. 어디에서나 빛이 나는, 그야말로 성공한 삶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강점이 다양한 관심사와 유연함이랬다. 한가지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여러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그걸 ’멀티포텐션라이트(Multi-potentialite)‘라고 한단다. 한국말로 하면 다능인. 급변하는 이 시대에는 전문가보다 다능인이 생존에 적합하다나. 근데 좀 맞는 거 같다. 나도 딱히 한 군데 특출난 건 없지만 이것저것 하면서 여태 잘 생존하고 있다. 이게 다 내가 멀티포텐션라이트라서 그런 것 같다. 산만한 사람들이 재평가 되는 시대가 오다니. 봐라. 이름 붙이면 있어보인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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