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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09. 2024

만화 그리는 거 지겨워 죽을 것 같다

권태형 게으른




욕은 아닌데 원색적인 말들이 있다. 웬만하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은 말들, 그러니까 뾰족한 해결방법 없이 부정적인 에너지나 내뿜는 노골적인 말들 말이다. 나는 이 세 가지가 TOP 3라고 생각한다.

“짜증나”, “지겨워”, “귀찮아”

아, 보자마자 피곤해지는 말들이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최대한 피하도록 하자. 그러나 셋 중 질적으로 다른 놈이 한 가지 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조금 지나면 금방 진화되는 감정이지만 이건 쉽게 꺼지지도 않으며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면 점점 더 거세진다. ‘지겨움‘ 말이다. 그래서 지겨움을 입밖에 낼 때면 깊은 작심을 하고 두 세 번 정도 더 생각하고 꺼내야 한다. 앞에 ‘솔직히’ 같은 걸 붙여서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그 일이 싫어지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솔직히 만화 그리는 거 지겨워서 죽을 것 같다!

아,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이 노란 대가리만 봐도 힘 빠진다. 얘한테 미안하긴 한데 얘도 그런 놈이라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다른 작가들 이야기 들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캐릭터에 애정도 생기고 굿즈도 만들고 싶고 한다는데 나는 매일 언제 끝내야 하나 완결 각만 보고 있다. 몇 십 년씩 장기 연재하는 <원피스>나 <명탐정 코난> 같은 거 보면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보다 작가가 더 초인 같아서 경외심이 든다. 뭐랄까 사우나에서 꼼짝 않고 몇 시간 동안 가부좌 틀고 있는 기인들 쯤? 나는 보통 모래시계 한 바퀴 돌기 전에 뛰쳐나가는 편이다.




나는 항상 그랬다. 만화 뿐만 아니라 공부도 일도 연애도 게임도 금방 지겨워져서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난이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은 아주 쉬워지면 오히려 도로 더 하기가 어려워졌다. 학창시절 수업 내용이 알 만하다 싶으면 더 잠이 쏟아진 일이나, 병장 시절 짬을 먹을수록 군생활이 더 견디기 어려워진 일이나, 직장인 시절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더 출근하기가 힘이 드는 일처럼. 재미를 잃어버리는 속도는 내가 ‘영리’해질수록 가속도가 붙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영악’해진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연애에서도 볼 수 있듯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싶으면 - 곧이어 긴장이 풀리고 - 결국 상대가 만만해지는 일련의 과정. 그러다 보면 나쁜 놈이라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진짜 미안하지만, 그건 어떤 계산에 의해 치밀하게 치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유의 인간으로서 본능 같은 거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꼭 피자처럼 느껴진다. 첫 조각이 가장 맛있고 나머지 조각은 죄다 더부룩하다. 더부룩하다는 표현이 알맞다. 지겹고 시시한 일들을 때려치고 자빠져 누울 때 드는 감정이 ‘개운함’이니.

그렇지 않던가? 직장 생활을 가장 더부룩하게 만드는 건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파일 보다는,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과 책임으로 귀결되는 모든 사내 인과 관계들 쪽이었다. 그런 지겨움을 견디고 일상을 연명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한 것이어서 다들 화학작용의 힘을 빌렸더랬다. 아메리카노의 카페인이라던지, 자양강장제의 타우린이라던지…





이런 인간으로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가장 큰 저주이자 축복은 ‘재미’에 민감한 것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재미 없음’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무언가 일이 주어졌을 때 남들보다 곧잘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누구보다 크게 불타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의 초반부에서 나의 수행능력은 놀랍다. 전혀 게으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적응하고 영리하게 쉬운 방법을 찾아낸다. 혹시, 어쩌면 내가 천재라서 이렇게 세상 일이 쉽게 지겨워지는 건 아닐까? 피자 한 판을 시켜도 단 한 조각 만에 그 오묘한 맛과 즐거움을 모두 느껴버리는 천재…! 그러니까 자꾸 새로운 걸 찾는 거지.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라면서. 핫쉬 이게 다 내가 천재여서 힘든 거였어. 일단 오늘은 다 지겨워 죽겠으니까 천재는 좀 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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