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게으른
내가 완벽주의자냐고? 전혀 아니다. 나는 기준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어떤 예술의 경지라던가 빈틈 없는 논리, 뭐 그런 것들이랑은 거리가 멀다. 차라리 ‘엉성주의자’ 쪽에 가깝다. 대신 좀 그런 건 있다. 최소한 ‘허접하고 싫지 않다’ 같은 마음? 최소한 글 한 구석엔 줄 그을만한 문장 하나쯤 있으면 좋겠고, 최소한 딴 데서도 볼 법한 뻔한 문장은 없으면 좋겠고, 최소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재미있는 라임 하나 쯤은 붙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소소한 기준들. 그런데 만만한 기준이라도 여러 개를 동시에 충족하려다 보면 꽤나 어려워진다. 그런 식으로 나에게 글 쓰기는 늘 부담스러운 작업이 된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면서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 요즘은 ‘스토리’에만 주로 게시글을 올리고 있다. 그건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피드’에는 뭘 올리기가 두렵다. 분명 업로드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나는 타고난 관심종자라 뭔가를 만들어 올리고 사람들 반응을 보는 게 좋다. 그런데 어쩐지 피드 만큼은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미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두고두고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걸 올려야 한다는 강박, 수려한 걸 채워야 한다는 강박, 뭔가 정제된 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 장인 정신을 앞세운 강박 관념인 것이다.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사소한 흠집까지 잘 보여서일까, 뭔가를 잘 만들어내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막중하게만 느껴진다. ‘피드에 박제’라는 말도 어떤 그런 고상한 무게감에 연상되어 생겨난 게 아닐까?
요즘 원고를 쓰느라 매일 스타벅스에 출근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다. 한 달이 넘어가다보니 어느 정도 패턴이 생기는 바람에 몇 줄 읽으면 글 말미가 예상이 되는 뻔한 글이 되기 일쑤고, 표현들도 죄 진부하게만 느껴진다. 처음엔 애정 가는 몇 줄을 떼어다가 자주 꺼내도 보고 SNS에 공유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글을 한 편 쓰고 나면 창피해서 다시 보기가 겁난다. 빈 화면을 켜놓고 쉽게 문장을 못 시작하고 딴짓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미술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이게 뭔지 잘 알고 있다. ‘슬럼프’. 연습 효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저조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림쟁이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인데, 이게 아주 고약하다. 언제 어떻게 온단 예고도 없이 불쑥 닥쳐서 ‘그것도 그림이냐’ 왁하고 의욕을 다 꺾어버리는 것이다. 이 때에는 주변의 작은 성공에도 쉽게 질투가 나며, 누군가 독려나 칭찬을 해주면 외려 더 작아져버리는 아주 꼬여버리는 상황이 된다.
슬럼프에 크게 빠지는 때에는 정말 위험하다. 얼마 있다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영영 그 손을 놓아버리게 되니까. 그렇게 미술에서 손을 떼고 떠난 동료들을 여럿 봐왔다. 사실은, 바로 내가 그랬다. 어느 날 슬럼프에 크게 치이고서 10년 넘게 전공해온 미술에게 포기를 선언했다. 그림 더는 그리고 싶지 않다고, 이만큼 밖에 못 그리는 내가 미웠고, 나보다 잘 그리는 남이 미웠다. 그 때는 세상이 다 미웠다.
슬럼프가 미운 까닭은 나 자신에게 섭섭한 마음일 거다. 왜 열심히 노력했는데 늘지 못하냐고, 순수하게 성장을 원했을 뿐인데 왜 벌이 주어지냐고, 어디가 잘못된 건지도 알려주지 않는 그 정체가 속상한 거다. 노력과 성장은 항상 비례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마음처럼 움직여지지도 않고 답답하게 가슴만 욱씬거린다. 몸처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도 알이 밴다.
그러나 몸에 알이 배면 운동으로 풀어야 하듯 슬럼프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란 참고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래야 그 자리에 근육이 붙고 튼튼해지는 거겠지. 고강도 하체 운동을 마치고 아장아장 절뚝거리며 ‘아 오늘 하체 맛있다’를 외치는 헬스 매니아처럼, 약간은 낙관적인 마조히스트가 될 필요가 있다.
설령 그렇게 이어간 내일 마저 형편없다고 할지라도 너무 자책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섭섭함을 미워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