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값에 대하여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든다. 다르게 태어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굳이 차은우나 이재용 딸까지 갈 것 있나. 할 수만 있다면 맞바꾸고 싶은 인생이 내 주변에도 널렸다. 100억 부자 유병재가 아니라 그냥 유병재라도 바로 쿨거래 가능하다. 물론 유병재 쪽에서 바꿔줄 리가 없겠지만.
남이랑 비교할 것도 없다. 당장 내 과거의 모습들과 비교해봐도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다. 몇 년 새 살도 부쩍 쪘고 빚도 늘었다. 나는 성장이라는 게 복리 개념이라 나이 먹을수록 무조건 성숙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건 명백한 역성장이다. 누군가 ‘아냐, 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줘도 ‘니가 뭘 아는데’ 하며 삐딱하게 받는다. 건성건성 말하다니,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아 그렇다고 팩트를 꽂아달라는 말은 아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니가 뭘 아는데. (…)
맞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겠지.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이유는 너무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역량과 잠재력과 성과들을. 겨우 이 정도 밖에 못할 깜냥이 아니면서, 훨씬 잘 해낸 적도 많으면서. 마음만 먹으면 잘하면서 앓는 소리만 하니까 말이다. 이런 건 전혀 나답지 않은 모습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런 마음은 요즘에 와서 부쩍 늘어난 것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괜찮았던 시절에도 나답지 못하다고 스스로 엄격하게 다그쳤다. 여기서 성장물 클리셰 한 번 등장하겠다.
걱정 마라. 나의 나다움을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없다. 안 궁금한 거 다 안다. 다만 누구든 자신의 나다움을 떠올릴 때 본인 인생의 총합이나 평균을 이야기하진 않을 거다. 자신의 하이라이트, 리즈 시절을 떠올리겠지. 나도 지금 침 흘리면서 내 가장 잘 나갔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한참 나다웠던 순간을 회상하다 보면 덜컥 겁이 난다. 혹시 내 인생은 이미 고점을 지나온 게 아닐까? 이제 남은 시간은 내리막을 감내하며 나다움을 잃어가는 데 소진하는 건 아닐까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 때문에 나에 대한 기준을 영광의 시대에 단단히 고정해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 잊지 말라고, 반짝 터진 뽀록이 아닐 거라고. 그럼 이걸 나다운 거라 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나라고 말했지만 실은 나는 나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
성장에도 관성이란 게 있나. 사람들은 몸이 다 크고도 성장이 멈추는 걸 두려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꾸준히 자신의 고점을 갱신하려는 시도를 한다. 자기계발 같은 거 말이다. 이게 ‘진학’이라든지 ‘취직’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레벨업 시스템이 있을 때는 좀 괜찮다. 그런데 다음 레벨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부터는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랬다. 꿈에 그리던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취업이 내 인생 최대 업적이고, 그 이후 30년의 회사 생활이란 그저 노화나 도태의 과정이며, 목표로 삼을 내 다음 레벨이란 저 머리 벗겨진 부장님 밖에는 없는 듯 느껴졌다. 공포감에 휩싸였다. 저 부장님은 회사생활이라도 잘해서 여태 살아남기라도 했지, 나는 엑셀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맨날 틀린 데 또 틀리는 저능아였다. 이런 때에는 내 미숙함이 더 디테일하게 보인다.
나이 서른을 기점으로 그런 불안감은 더욱 심해졌다. 이 나이면 돈은 얼마 모았어야지, 커리어는 얼마 쌓았어야지. 혹은 뭐가 됐든 능숙해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나잇값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국이 나잇값에 대해 좀 엄격한가. 꼭 나이별 임무 같은 게 신체 나이 마냥 정해져 있는 것 같다. <20대에 준비할 20가지>, <30대에 안하면 후회할 것들> 이런 건 맨날 스테디셀러고, 공부나 취업이나 때로는 연애까지도 다 때가 있다고 위협하며 조금만 늦어도 뒤쳐졌다고 한다. 스물셋넷만 돼도 대학교 가면 화석이라고 부르던데 뭘. ‘그 나이에 대단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지만 실상 제 나이때 맞춰 제값 하기도 벅차다. 성장이 멈추는 게 두려운 까닭은, 내 성장과 관계 없이 기대값은 계속 상향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가 나한테 뭐라고 한 적은 없다. 말했듯이 남들은 나한테 나쁜 말 잘 안 한다. 함부로 말하는 건 나다. 내 안의 노파심이다. ‘사회가 나한테 기대하는 값’이라 말하면서 자꾸 스스로를 쥐어박는다. 노파심이라는 표현이 알맞다. 집에서 부모님이 ’밖에 나가서 욕 먹을까봐 그래‘라고 말하는 마음과 비슷하니까. ‘나 잘 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명분으로 마음껏 예민하게 굴고 있다. 그걸 자기통제력이 강한 거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그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늘상 꾸중 듣는 표정을 한 채 말이다.
사람이 늙는 까닭은 내 안의 노파 때문이 아닐까. 노파심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이 나이에 아직?‘이라든가 ’난 아직 멀었어‘처럼 대부분 재촉이다. 나이값을 더 빨리 더 많이 치르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나이보다 빨리 앞서나가려는 마음이 나이보다 빨리 늙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애늙은이‘나 ’젊은 꼰대‘가 된다. 옛날 사람들을 봐라. 철이 일찍 들어서 서른이면 벌써 주름이 잔뜩 폈다. 나같은 자식들이 속썩여서도 있겠지만. 아무튼 고생하면 빨리 늙는 건 사실이고 그 고생엔 매일 괴롭히는 내 노파심도 한 몫 했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에게 매순간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거룩하게 포장하지만 결국 ‘불화’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젊다는 안일함으로 이걸 방치하고 있지만 이대론 나도 모르는 새 불행한 늙은이가 되고 말 거다. 그리고 어느날 후회하겠지. 젊음에 대해 감사할 줄 몰랐노라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구긴 채로 말이다.
조숙의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미숙한 자신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 까짓거 좀 미숙할 수도 있지 뭐 어떠냐는 뻔뻔함이 필요하다. 뭔가 실수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거침없이 욕을 박았던 나를 뜯어말리고 ’미숙하다는 건 젊다는 것 아니겠어 허허‘ 하면서 여유있게 받아주라고.
그리고 흐린 눈으로 보면 실수한 날만큼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도 많다. 사실 나는 저능아가 아니고 꽤 유능한 사람이거든. 자기효능감이란 혼날 때보다는 신날 때 더 많이 생긴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별로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결론이 대책 없는 힐링글처럼 됐는데 선을 긋자면 나는 명백하게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말하자면 안티에이징 같은.
앞으로 나다움을 말하게 된다면 내 인생의 최고점이나 평균보다는 총합에 기준을 두려고 한다. 내 최고점은 너무 자기 자랑 같고 평균값은 계속 달라지는 거니까, ’내가 좋은 기분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들의 총합‘ 정도면 좋겠다.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 같은 건 아무리 설명해도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내 정체성을 정의해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 기억들의 다발이라면 몇 억을 줘도 유병재랑 안 바꿀 거다. 물론 유병재 쪽에서 바꿔줄 리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