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고리오 영감'을 읽고
아름다운 영혼들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구나. 하긴, 위대한 감정들이 치사하고 편협하고 피상적인 사회와 어떻게 한통속이 될 수 있겠어?
책이름: 고리오 영감
글쓴이: 오노레 드 발자크, 임희근 옮김
출판정보: 열린책들, 2009년
계명대학교 교양 총서로 발간된 판본에는 '라스티냐크의 눈에 비친 대혁명 이후의 파리'라는 부제가 추가되었는데,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적절하게 설명해 준다. 이 책은 혁명 전후의 프랑스 파리 교외의 작은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다. 하숙인 중에서도 특히 고위 법조인의 꿈을 품고 시골에서 상경한 라스티냐크와, 제면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척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인물 고리오 영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라스티냐크는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순수한 청년이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파리의 사교계를 통해 출세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그간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위험과 부조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 자신이 본래 지닌 순수한 도덕심과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이타적인 가치관이, 높은 지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계책들과 충돌한다. 그 가운데 라스티냐크는 낯선 상류층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인지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라스티냐크의 갈등은 같은 하숙집에 머무는 보트랭이라는 정체 불명의 인물과 고리오 영감을 통해 현실적으로 부각된다. 두 인물은 마치 천사와 악마가 각각 양쪽 귀에 대고 유혹하듯이 라스티냐크를 부추긴다. 보트랭은 왜곡된 정의관을 내세워, 이 사회에서 출세하고 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부도덕과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적당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고리오 영감은 보트랭처럼 자신의 가치관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어리석게까지 느껴지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서 보전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 라스티냐크의 한쪽 귀에서 독자들에게까지, 보트랭의 검은 속삭임이 전해진다.
"세상은 항상 이랬어. 도덕군자들은 절대 세상을 바꾸지 못해.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야. 때로는 어느 정도 위선적이고 말이야. 그런데 순진한 얼간이들은 풍속이 바르다느니 아니라느니 하고 떠들어 대지. 나는 민중 편을 든답시고 부자들을 비난하지는 않네. 위에 있으나 밑에 있으나 중간에 있으나 사람은 다 똑같다네."
"타락은 제멋대로 날뛰고, 재능은 희귀하다네. 그래서 부패야말로 사방에 넘쳐 나는 용렬함의 무기인 셈이지."
혁명을 겪으며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부정되면서도 아직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한 과도기의 프랑스에서는, 돈과 명예만이 추구함직한 가치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서로를 속이고, 편을 가르고, 회유하거나 배척하기 일쑤다. 라스티냐크는 번쩍이는 장신구와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의 거짓된 미소 뒷편에서 그와 같은 세상의 어두운 이치를 깨닫게 되고, 거기에 참여하리라 다짐했던 자신의 결심에 회의를 느낀다. 출세에 눈이 멀어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그의 순수한 도덕심이 고개를 든다. 미덕은 악덕과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는 천사와 악마, 둘 중에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미덕이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누이들의 돈을 훔친 셈인가?"
순수한 청년의 이러한 회심, 미덕을 추구하겠다는 이상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풋내기의 치기에 불과할까? 악은 유약한 인간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아! 우리에겐 아직도 미덕에 푹 젖은 기저귀가 몇 개 있구먼."
선과 악의 속삭임 가운데서, 라스티냐크는 여러 차례 '기저귀'를 벗어 던지고 '타협'하기도 한다. 보트랭에게 돈을 빌리거나 거짓 정략결혼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그의 계획에 동조하기도 하며, 사교계의 귀족들을 교묘하게 속여 목표를 성취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선(善)에 대한 직관, 본래적인 도덕심은 끝내 타협을 거부한다. 헌신적인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고리오 영감을 보면서, 우리의 주인공은 마침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신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의 극적인 다짐을 간결하지만 힘있게 묘사한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품은 자부심의 힘을 알게 된다.
마침내 미덕의 편으로 돌아선 라스티냐크의 눈을 통해,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파리 사회 전반의 모습과 등장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더욱더 부조리하고 역겹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재산만을 노린 채 거짓 효도를 해왔던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의 눈물과, 짐짓 거창한 대의를 부르짖는 듯 했지만 결국 한낱 반사회적인 범죄자에 불과했던 보트랭의 변명은 초라하고 위선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선한 의지와 세상의 부조리는 제 자리를 찾아가고, 조용히,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게 '진짜' 싸움을 준비한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라스티냐크와 같이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마주하게 된다. 때로 성숙해진다거나 어른이 된다는 것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과연 세상에는 납득하기 힘든 부조리들이 가득하며, 그것들을 모두 피해서 '바르게'사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바보같이 여겨진다.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당한 속임수와 편법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여기거나, 보트랭처럼 인간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하여 스스로를 미화하려 애쓴다. 그러한 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데는 익숙하지만,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데는 소극적이다. 한마디로, 험난한 세상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세우고 추구하기란 몹시 어렵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흔히 '심지'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 소설은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개인이 심지를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과제인지, 또 그만큼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를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이 글의 시작에 소개한 라스티냐크의 한마디가 소설 전체를 요약한다. 일견 주인공처럼 여겨지는 라스티냐크가 아닌 고리오 영감이 소설의 제목으로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발자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선(善)에의 의지와 그 가능성을 긍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리오 영감의 심지는 그 무엇보다도 자녀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세상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그 심지의 불꽃을 잃지 않았다. 그 불꽃은 출세에 대한 욕망에 거의 잠겨있던 라스티냐크의 심지에 불을 밝혀 주었고, 그 불꽃은 이내 독자들의 가슴을 덥히며 다시 옮겨갈 심지를 찾고 있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끝내 지켜야 할 불꽃이 있다는 것을 믿는가? 그 불꽃이 타오르는 사람의 심지를 볼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심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 심지를 태워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자 하는가?
"이보게 친구, 자네는 자네 욕망에 일정 한계선을 긋고 겸손하게 운명을 따라가게. 나는 지옥에 있다네. 그런데 난 지옥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해"
깨달음을 얻은 라스티냐크는 지긋지긋한 파리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맞서기 위해 그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 우리는 그와 함께할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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