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942년에 출판되었다. 1943년 "시지프의 신화", 희곡 "오해",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면서 카뮈는 '부조리'의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글에서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그가 말한 부조리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핵심 축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는 법정에서 명확한 증거와 논리로 범죄를 판단해야 할 판사, 검사, 배심원들이 사건과 관련 없는 어머니 장례식 때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내리는 '부조리'이다. 두 번째는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무관심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의 뫼로소를 나는 '상품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이유는 산업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전통적 공동체는 무너지고, 개인의 삶과 목숨이 도구화되면서 타인과 자신에게 무감각한 뫼르소의 인간유형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부조리'와 '상품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서로 연관되어 진행되지만, 결말 부분에서 이 두 가지가 만나서 깨어지는 순간이 생긴다. 그것은 뫼르소가 사형 집행 전날 죽음 앞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부조리'와 '상품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이 만나서 깨어지는 시점은 자신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였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왜 양로원에서 남자 친구를 만들고, 산책을 했는지 이해를 했다. 이는 사람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자신(상품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을 깨뜨리는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햇빛과 더위, 그리고 성욕 밖에 느끼지 못한 뫼르소가 그 시점에서야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를 느끼고,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고, 행복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실존을 느끼고, 해방감을 맛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을 심판해 달라고, 맘껏 욕해달라고 한다. 그때서야 뫼르소는 사람을 죽인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즉, '부조리'의 상징인 죽음 앞에서 '상품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에서 깨어 나와 자신의 실존을 느끼게 된다.
먼저 '부조리'의 의미를 살펴보자.
부조리는 사전적 의미로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는 일", 철학적으로 "무의미(無意味)하고 불합리(不合理)한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는 인간의 상황이나 조건.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 인식 가능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전통적 믿음이 무너진 현대 사회의 병리 상태(病理狀態)를 나타낸 말로, 프랑스의 작가 카뮈(A. Camus)가 그의 책 '시지프의 신화'에서 쓴 용어"라고 나와 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교육을 받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살아가지만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의 존재가 생존을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론은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의 결론이 죽음이라면,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부조리'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지만, 주인으로서 살 수 없다. 내가 부모를, 사는 지역을, 나라를, 대륙을 선택할 수 없다. 현재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난다면, 같은 시민권자인 백인과 다른 오랜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온 인종차별과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살아갈 확률이 더 높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태어날 경우, 선진국들의 아이들보다 교육 기회를 가질 확률이 낮다. 내가 내 존재에 대한 주인이지만, 태어날때부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기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외부환경에 의해 선택되고 의존하게 된다. 즉, '부조리'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 된다면 '부조리'를 벗어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만들어 내는 관습과 문화 속에서 내가 스스로 직업과 결혼(개인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결정) 등을 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것이 내가 스스로 만든 기준에 의한 선택인가? 아니면 문화나 관습이 만들어 낸 좋은 직업(고연봉과 안정된) 기준과 좋은 배우자 기준(외모, 학벌, 직장)을 따라한 선택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낸 기준에 의해 선택하고 있다면,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아닌가?
자라온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벗어나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 주의 깊게 자신을 살펴보고, 누군가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실존주의에서는 주체자라고 부른다.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존주의는 산업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등 인간의 도구화 및 소외가 극심하게 진행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는 거의 1천500여 년을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사상에 대한 반론이기도 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그 목적을 성취한다고 보았다. 그 삶은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었다. 하지만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을 위해 기독교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후 기독교는 국교로 지정되었다. 로마가 무너지고, 교황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유럽은 정교일치의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정교일치의 체제를 기독교 국가체제라고 부른다. 기독교 국가체제에서는 다른 종교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발적 응답에 의한 개인의 삶의 목적은 신앙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되기 시작했다. 결국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교황과 사제, 교회가 만들어 놓은 온갖 사회적 규범을 따라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자유, 책임, 주관성은 용납되지 않았다.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공고했던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로 분리되지만, 기독교 국가체제의 근본은 변화되지 않았다. 여전히 기독교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발발하자, 농업 중심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전통적인 공동체는 무너지고, 공장에서 인간은 상품을 만드는 부속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늘 전쟁을 해왔던 유럽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식민주의와 무기 산업의 획기적 발전은 사람들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 나가서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의 만든 결정에 의해 수천만 명이 죽어나가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실존주의는 인간은 삶의 목적에 앞서 실존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로서의 인간을 제시한다. 개인의 삶은 국가나 관습이 아닌 개인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그의 스승인 실존주의 철학자 장 그르니에 교수를 만나면서 실존주의 접하게 된다. 나는 카뮈가 실존주의에서 '부조리'를 끄집어내었는데, 그 이유가 그가 자라면서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존주의라는 렌즈를 통해 이 세상을 바라봤을 때 '부조리'는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1살 때 전쟁에서 죽고, 그때부터 시작된 극심한 가난과 폐결핵은 "왜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항상 하지 않았을까? 한걸음만 다가가면 죽음인데 말이다.
카뮈가 말한 주체자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방해 요소들은 누구나 예외가 없는 죽음이며,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문화 및 관습이다. 그래서 이 부조리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세 가지 인간 유형을 카뮈는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어차피 내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은 개인의 실존을 스스로 파괴시키는 것이기에 모순된다. 두 번째는 관습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주체자로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항하는 인간이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지고 사회적, 관습적 기준들에 반항하면서 사는 것이다. 카뮈는 이 반항적 인간을 주체자로 보았다.
책 '이방인'에서는 반항하는 인간 이전에 도구화된 인간이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는 과정과 종교적 관습에 저항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음 글에서 책 안으로 들어가서 이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