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싱클레어 Aug 27. 2019

도구화된 인간에서 저항하는 인간으로 - 2

[독서노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부조리'는 이 책의 첫 문장부터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제였나?"


자신의 키워주고, 가장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관계가 부모이다. 그런데 엄마가 죽었는데도 감정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마치 모르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무관심하게 말하는 것은 뫼르소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오는 친밀함과 소속감,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휴가를 내려고 사장에게 말했을 때, 사장은 그에 대해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하지 않으며 직원이 휴가를 가는 것에 대해 언짢아한다. 사장의 모습과 뫼르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은 사형당하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인간사회란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낸 집단 사회이다. 그래서 관계란 것은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요인이다. 관계를 잘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공감능력이다. 이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이 힘들거나 내가 힘들 때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또한 이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혹은 동정의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 어느 사회를 가든 탄생, 결혼, 죽음을 기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공감능력을 극대화시킨다. 특히 죽음은 원수도 용서할 수 있게 끔 만들어 주는 계기도 될 수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들도 죽음 앞에서는 그리움과 애통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엄마의 장례식 때 아무런 감정 없이 마지막 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뫼르소의 모습과 하관을 할 때 빨리 알제로 돌아와 12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어서 기쁘겠다는 생각은 뫼르소에게 있어 엄마는 자신과 철저히 분리된 사람임을 드러낸다. 즉, 관계에서 오는 부조리를 보여준다.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번 말한 것처럼, 그건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결혼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그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한 헌신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사랑은 하지 않는다면서 마리가 결혼을 하자고 하니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한다. 이를 통해 뫼르소가 다른 사람과 육체적 관계는 맺을지라도 정신적, 감정적, 애정적으로 결합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를 자각하고, 고독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들하고 공감하며 결합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뫼르소는 감정이 없는, 마치 도구 혹은 상품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뫼르소가 '도구화된 인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레이몽의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그녀가 레이몽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리고 레이몽이 정부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어서 벌을 주어야겠다면서, 뫼르소에게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한다. 그는 귀찮았지만 저녁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에게 위협하는 편지를 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가 잘못을 했던 안 했던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가담하고 방관하려고 할 때, 무의식적으로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살인


뫼르소는 친구 레이몽의 소개로 마송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 거기서 레이몽이 먼저 아랍인들에게 다가가서 시비를 걸고,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고 나서 뫼르소는 혼자 총을 가지고 바람을 쐬러 간다. 뜨거운 태양과 더위 때문에 바위 그늘을 찾아 가려고 하자, 좀 전의 싸움에 끼어있던 아랍인이 누워 있음을 본다. 여기서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과 더위 때문에 가까이 가면 문제가 생길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가까이 간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아랍인은 단도를 꺼내어 뫼르소의 눈썹을 잘라버리고, 어머니 장례식 때 느꼈던 뜨거운 햇볕과 눈부신 칼날 때문에 총을 거머쥐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런 그의 행동은 정당방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가까이 가면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을 알면서 갔을 뿐 아니라, 단지 그늘이 필요할 뿐이라면, 말을 걸어서 싸울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으로 그를 쏴버리고 만다. 그 이유는 뜨거운 햇빛과 더위, 뜨거운 바람이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보통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시키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상대방을 도구화시키는 것이다. 군대에서 수없이 사격 연습을 하고, 적을 괴물 혹은 사살해야 할 대상으로 세뇌시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에서 위안부, 생체실험, 홀로코스트 등 전쟁범죄가 만연한 것도 군인들이 사람들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만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여도 죄책감을 느끼서 그 폭력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과 다른 이야기이지만, 짧은 기간이더라도 사람을 도구화시키는 훈련을 받은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가 사회에 나오면, 그 사회는 위계적이며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아무런 가책도 없이 쓰러진 사체 위에 다시 4발을 쏜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나 혹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전쟁상황에서의 군인들에게 가능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면 정신적 충격 때문에 온 몸이 떨리고, 경직되어서 생각이 마비되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쓰러진 사체 위에다 이유 없이 4발을 쏘았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뫼르소는 사람을 도구화시키는 사람의 성격유형을 확실히 보여준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아무런 감정 없는 도구처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뫼르소는 단순히 사회에 어울리지 못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지만 도구인 뫼르소의 존재론적 '부조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카뮈는 이 책을 '이방인'이라고 제목 붙인 것은 아닐까?


재판


법원에서는 증거와 명확한 논리를 중심으로 사건 판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뫼르소의 재판에서는 살인 사건과 관계없는 어머니의 장례식 때 울지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어 사형이 선고된다. 우발적 살인으로 일반적으로 3-4년형을 선고받는데, 뫼르소는 사형을 언도받는다. 이를 통해 세상이 부조리하더라도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며, 법적 근거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을 관습으로 판결함으로 인해 공권력에 의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 판결은 부조리의 최종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가톨릭, 사형


이 재판 과정에서 예심 판사와 신부의 만남이 나온다. 무신론자인 뫼르소는 재판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질문을 예심 판사에게 받는다. 그 판사는 뫼르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를 낸다. 소설 속 혹은 카뮈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머니 장례식에 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관습으로 만들어진 규율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뫼르소는 혹은 카뮈는 그것을 거부한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던 뫼르소는, 심지어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유독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분명한 거부의사를 밝히고, 자신의 사형 집행 전에 기도를 해주려던 신부와 심한 논쟁을 벌인다.



무엇이 뫼르소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만들었나?


그 논쟁의 핵심은 사후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신부는 사형이 뫼르소의 살인죄에 대한 심판이 전부가 아니라 사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 천국으로 가라고 한다. 뫼르소는 자신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죽으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신부의 질문에 동의한다. 신부는 뫼르소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감방의 돌 위에서 성스러운 얼굴을 찾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뫼르소가 찾으려는 얼굴은 마리의 얼굴이었다. 다시 한번 신부는 뫼르소에게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내세를 믿는지, 다른 생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물어본다. 뫼르소는 내세는 '지금의 이 생애를 기억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라고 대답한다.


신부는 뫼르소가 천국과 심판에 대해서 인정하려 하지 않자, 자신의 권위로 뫼르소를 억압한다. 왜 자기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지 물어보지만, 뫼르소는 "화가 나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한패"라고 대답한다. 신부는 뫼르소의 마음이 어두워서 그렇다면서 기도하겠다고 말하자, 뫼르소는 신부를 움켜잡으며 폭발한다.


당신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털만 한 가치도 없다. 당신은 죽은 사람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으냐?
나는 빈손인 것 같으나 확신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당신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내게는 있다.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신부는 죽음 이후의 이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뫼르소는 지금 현재 느끼고, 만지고 할 수 있는 실존의 인식만이 진리라는 것을 주장한다. 뫼르소가 신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내세가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힘은 바로 부조리한 세상 속의 현재의 나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부조리한 세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당면한 이 부조리한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이 부조리한 세상 속의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 살아있는 나 자신을 깨달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뫼르소는 내세가 있다는 희망이 부조리한 세상의 현실을 도피하는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하나님을 믿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믿음이 이 부조리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 기득권층과 특권들을 내버려 둔다는 것이고, 세상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기독교(가톨릭 포함)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카뮈가 기독교가 한 개인으로서 이 부조리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즉 주체자로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근본 프레임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제1,2 차 세계 대전에서의 소수의 정치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천만명의 사람들을 전쟁의 도구로서 사용해 버리는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내세가 있으니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라라는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카뮈가 뫼르소를 통해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 당시의 사회를 묶고 있는 가장 강력한 관습인 종교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을 사형 전날 신부와의 논쟁에서 보여준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신부에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관습적 힘을 가진 신부에게 모든 것에 무감각하던 뫼르소가 저항할 수 있었던 계기는 뫼르소가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난 후였다. 매일 새벽에 간수들이 자신들을 데리러 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과 나의 존재가 사멸된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에게도 자신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던 뫼르소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뫼르소가 내세가 아닌 현재 살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종교적 관습에 저항할 힘이 생겼고, 신부에게 멱살을 잡으며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부와의 논쟁 이후에, 그는 별들을 보고, 들판의 소리를 듣고,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를 느끼고, 어머니가 말년에 왜 '약혼자'를 가졌는지를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자신을 넘어서 어머니와 자연과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죄를 사형 집행 날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맞이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된다. 즉, 부조리의 대명사인 죽음 앞에서 그는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역설적으로 그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죽음보다 현재의 실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는 지금 이 시간에 실존하는 내 자신이 세상의 부조리와 미래의 죽음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말한다. 결국 나의 실존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에, 나는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기에, 나의 실존적 의미를 방해하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죽음과 맞써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결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주체자로서 부조리화 된 세상의 관습에 저항할 수 있게 된 뫼르소는 오늘날 여전히 부조리화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주체자로서 우리를 얽매이고 있는 부조리에 대해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Q: 내가 현재 체감하는 부조리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어떻게 나 자신이 저항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기독교에 대한 나의 생각: 기독교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기독교는 변질되기 시작했고, 십자군 전쟁, 면죄부 판매 등과 같이 부패했으며,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역사적 사실이 있고, 이는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나의 관점으로는 성경과 예수를 알면 알수록,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닌,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래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처럼 이 세상의 삶과 동떨어진 신앙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이 부조리화된 세상에서 소외되고, 약자인 사람들이 자신들을 묶고 있는 사슬을 예수의 이름으로 풀어버리고,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은 산들이 평지가 되듯, 부조리화된 세상에 저항하는 신앙이며, 이는 자발적으로 예수 따름을 고백하고, 이에 따른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신앙이다. 그래서 주체적인 신앙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인 정의, 평화, 생명, 사랑이라는 가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