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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Sep 28. 2019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독서노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일본 신문학사상 천재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소설은 서술자가 주인공인 오바 요조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3인칭 시점을 가진 서문과 후기, 그리고 오바 요조 자신이 쓴 수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소설 속의 소설가로서 안면이 있었던 교바 시 스탠드 바의 마담으로부터 사진 세장과 함께 요조의 수기를 건네받고, 소설의 재료로 삼으라는 마담의 말대로 요조의 사진 세 장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쓰면서 시작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수기는 요조가 쓴 글이고, 후기는 이 소설을 마무리하며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이런 구성을 쓴 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내면과 삶을 드러내는 요조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 봄으로써 그동안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마치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인간실격"이라는 사망선고였습니다. 그의 사망선고는 실제 삶으로 나타나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책 속에서 찾아보았고, 주인공 요조와 같은 사람들이 나의 주변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요조가 있다면 가면을 벗고, 솔직해도 안전한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그가 정의한 인간이 아닌 요조 그 자신이 되도록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훈훈한 미소로 대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하는 눈짓 하나 표정 하나, 말투와 목소리에 담긴 그 사람의 감정들, 나에 대한 태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미세한 변화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알려고 의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한눈에 파악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비난 혹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리 나를 속이려고 용을 써도, 그런 노력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을 만날 때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존중해 준다면 타인은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나에게 비호감과 적대적인 태도로 대할 때 타인은 고통이 됩니다. 거기다가 자신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 타인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라면 타인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공포행복


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사람이 적대적으로 바뀔 때, 타인은 나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배신감과 더불어 찾아오는 자신 스스로에게 행하는 혐오와 비난. 이런 경험들이 반복될 때, 타인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늘 나에 대한 호감적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들, 안전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보일 때 마음을 열지만 조금이라도 그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순간 나의 마음은 닫히고, 도망가거나 가면을 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면 속의 자신의 모습은 외롭습니다. 너무 외롭지만 안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그것을 빌미로 나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점들이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호감 있는 사람들에게 퍼져 나갈 때, 그리고 그 사람들의 태도가 호감에서 적대적으로 변할 때, 나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적대적 감정만 남은 좀비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둘씩 눈빛이 바뀌고, 오로지 나를 물어뜯기 위해 온갖 꼬투리를 삼기 시작합니다. 표현과 몸짓 모두가 부자연스럽고,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습니다. 그러다 좀비 바이러스에 완전히 감염되었을 때, 어그적 어그적 거리며 나를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상처 받기 싫어서, 남들에게 공격하기가 겁이 나서, 좀비가 되기 싫어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다 결국 꽉 막힌 딱 한 명만 누울 수 있는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은 어둡고, 춥고, 외로운 곳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독방에서 계속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야 되나? 이 두 가지 선택지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조는 사람들의 표정, 말, 태도에 너무 민감한 사람이기에, 남이 함부로 자신을 대해도 남을 비난하거도 저항도 못하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에 대한 탈출구로서 타인이 자신을 바라봐 줬으면 하는 모습(호감스러운 모습)과 타인을 공포스럽게 바라보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광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좀더 자세히 책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구상에 홀로 있는 나 vs 누군가와 함께 있는 나 :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하는 나 vs 타인과 하나되기를 갈망하는 나


요조가 바라는 것은?


요조는 어릴적 정거장 육교나 지하철도처럼 자신이 바라보는 사물의 이유가 타인이 실제로 그것을 만든 이유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실망합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자신이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집안의 규율과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남이 생각하는 "행복"이 다르다는 것은 요조에게 불안감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여기서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는 욕망을 요조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만큼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은 그에게 불안과 공포감을 안겨주게 됩니다. 또한 요조는 자신의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만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광대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요조는 그러한 불안과 공포감이 자신을 옥죄어 오자 이것을 탈출하는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광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밥', '행복', '타인이 느끼는 삶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무자각 등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틀키는 것이, 또 자신이 이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그는 스스로 광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인간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란 타인과 그 자신이 서로가 느끼는 감정, 사물에 대한 이해 등이 일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요조가 말한 인간이 되는 것이란 타인과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 타인에게 무(無), 바람이 되어버린 요조


타인은 그대로 있는데 요조 스스로가 그들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그로 인한 비난, 공포 불안이 두려워서 자신을 광대로 바꿔버립니다. 상대방에게 철저히 자신을 맞춰주는 요조의 모습이 여기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자신에게 꾸중을 하여도 반항 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꾸중이란 것이 타인이 자신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 때문에 혼내는 것이고, 그 사람을 비난하고 화내는 것은 내가 타인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이었기에, 반항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반항을 한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대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사람들을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빈 존재야.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광대짓으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광대 짓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서 요조는 극단적으로 무(無), 바람이 되었습니다. 타인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없애버립니다.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광대가 된 요조는 타인이 자신을 보고 화내지 않고 웃어 주기만을 갈망하며, 타인이 광대의 모습 속에 감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화날까 두려워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거짓으로 자신의 선물을 '사자탈'을 적어서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줍니다.  요조는 '존경'받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아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간파당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노여움과 복수가 두려워서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낀 요조


그 당시 저는 이미 하녀와 머슴들을 통해 서글픈 짓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 어린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중에서도 가장 천박하고 잔인한 범죄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참았습니다.... 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정부에 호소해도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신은 자신이 어릴 적 하녀와 머슴들한테 당한 성적인 폭력을 부모님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의 편이 되어 정의를 이루어질 어른 혹은 성인들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정의하는 인간의 본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조가 말하는 인간이란?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깐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요조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뒤돌아서면 그와 반대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서로 속인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광대가 되어, 남들을 속이고 있어서 속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떻게 아무런 마음의 고통이 없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겉모습과 속 모습이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요조 자신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킬 것이 두려워 광대 짓을 하면서도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조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고 뒤에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이나 불편함을 가지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본성을 인간으로 정의하면서, 자신도 이렇게 뻔뻔하게 혹은 거리낌 없이 남을 속이고 다른 말을 하는 요령을 깨달았다면, 자신 스스로를 정죄하는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조는 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에 대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 요조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근원은 첫 번째로, 자신의 생각이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 했고, 두 번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타인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비난과 화냄이 너무 힘들었고, 세 번째는 자신이 힘들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저항할 수 없는 마음을 가졌으며, 네 번째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그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가혹하게 심판하는 마음, 다섯 번째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은 강한 욕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늘 자신에게 웃음을 보이도록 만드는 광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웃음 짓던 사람들이 나의 광대 안의 모습을 보고, 겉모습과 속 모습이 다른 것에 대한 분노와 화를 낼 것이라는 공포를 숨기고 있는 광대가 되었습니다.  



광대가 되어 타인에게 자신을 늘 감추던 요조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그린 자화상에 나타난 음산한 자신의 얼굴입니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그 자신의 얼굴 말입니다. 두 번째는 성노동자와 함께 있을 때였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도리어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픈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無), 바람이 된 요조가 백치 같은 성노동자를 만났을 때, 그는 마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는 것처럼 가면 속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속에서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요조에게서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고,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은 요조가 말한 인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노동자와의 경험은 여자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면서 계속 여성들에 의존해서 기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기꾼의 아내인 쓰네코의 집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 사람도 주위에서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이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여자였습니다....
"쓸쓸해"
저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 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무엇보다도 그 창녀들은 명랑했습니다)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내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이런 엄청난 말을 아무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 전체에서 두 번 다시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요조는 자신과 비슷한 느낌의 쓰네코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표현하면서, 그는 그날이 해방된 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준 쓰네코에게 함부로 대합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광대가 됩니다. 그는 쓰네코에게 다시 찾아가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게다가 저는 함께 잔 적이 있는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면 왠지 그 순간 상대방이 갑자기 불처럼 화를 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서 만나는 것을 몹시 내켜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점점 더 긴자를 멀리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켜하지 않는 성격은 결코 제가 교활해서가 아니고 여자라는 것이 함께 잘 때와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부터의 일 사이에 조금도, 티끌만큼도 연결 짓지 않고 완전히 잊어버린 듯 완벽하게 두 세계를 단절시키며 살아가는 그 불가사의한 현상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요조는 인간에게 느끼는 공포감을 자고 일어난 쓰네코에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룻밤을 보낸 여자들이 인간들이 서로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자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인간 중에 자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준 쓰네코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녀와 다른 성노동자와 다른 것은 성노동자는 백치와 바람, 거울로 인식되기에 자신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동질 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광대가 아닌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그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부끄럽게 느껴졌고, 그녀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가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때도 그는 광대처럼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쓰네코는 요조와 다시 하룻밤을 보내면서 쓰네코는 요조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요조는 거절합니다. 그날 밤 쓰네코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아가는데 완전히 지쳐버렸고, 자신도 두려운 세상에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녀가 말한 자살에 장난처럼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가진 돈이 우유 한잔 마실 돈밖에 없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자신의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당포에 다 팔아버리고 남는 것은 없다는 사실과, 더 이상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거기다 쓰네코의 무심한 한 마디는 그가 자살을 결심하는데 쇄기를 박습니다.


어머나, 겨우 그것뿐이에요?


세상 인간들이 너무 두려운데, 거기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도 없다는 현실을 무심하게 던져진 그녀의 한 미디가 요조로 하여금 직면하게 만들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생계비는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이 그녀의 한마디로 인해 깨지고, 현실에서는 그는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와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쓰네코에 대한 죄책감과 그때 느낀 절망감으로 술 중독과 여자들에 기생하면서 살아갑니다. 결혼도 하지만 아내가 겁간을 당하는 것을 반항하지 않고 지켜만 봅니다. 저항한다는 것은 아내가 겁간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행동들은 계속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었고,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 더욱더 술과 여자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술 중독에 빠진 남편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약사가 그가 술중독에 빠지는 것을 막고자 권해준 모르핀은 그를 모르핀 중독에 빠지게 만듭니다. 세상에 대한 공포->광대->자기혐오->중독->세상에 대한 공포의 악순환은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판단을 내리게 만듭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을 탈출하고자 자살을 결심하지만, 그가 자살할 것을 염려한 친구와 가족들에게 정신병동에 강제로 수용됩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게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눈물을 흘렸고, 판단력도 저항하는 것도 잊은 채 차에 탔고 그리고 이곳에 끌려와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가더라도 나의 이마에는 미친 사람,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겠지요.
인간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던 광대조차도 못하도록 정신병동에 감금되어 "폐인"이라는 낙인을 받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라며 인간실격이라는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리고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았던 다자이 오사무는 가면을 벗은 자신의 모습을 요조라는 인물로 보여주며,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가면 속에 살아가지만 마음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향해, 그리고 자신도 인간이 되고 싶지만 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나에 대한 폭력(비난, 화 등)을 그만 해 달라는 외침을, 지옥에서 벗어나 나도 안전한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그리고 세상이 나를 "폐인"으로 낙인 시켜버린 절망을, 나 스스로 "인간실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을, 외로움을, 쓸쓸함을 그의 책 “인간실격”에서 절규하는 것 같습니다. 쓰네코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자살을 시도 했던 것처럼, 적나라하게 자신을 안전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보여주며 현실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강에 몸을 던집니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타인은 나를 이해하는데 절대 좁힐수 없는 간격을 가지고 있기에 완벽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 간격은 인간의 어떤 언어와 행동으로도 나를 완전하게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타인은 나와 다른 가치 기준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내가 말한 것을 짐작할 뿐이지 10을 말했다면 10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13 혹은 7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이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요? 그 사람이 나를 존중하고 나의 말에 긍정적으로 말해주는 얼굴 표정, 미소, 말투 속에 담겨 있는 호감있는 감정들, 즉 그 사람이 나에 대한 태도를 통해 상대방이 완벽히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태도가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와 잘 맞아라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연유로,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호감을 가지도록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호감있는 태도로, 잘 들어주고, 미소짓고, 말에 나의 호감을 담아 부드럽게 전달한다면 그 누구라도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만날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날의 부정적 감정을 배제하고,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나의 결심과 나의 평소 습관을 바꾸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연습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서로 공감한다, 안전하다라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요조와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집중해서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존중하면서 호감을 표현한다면 그들은 가면을 벗고, 나로부터 행복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변에 요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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