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싱클레어 Jul 11. 2019

빨간머리 앤 (e):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

[독서노트] 초록 지붕집의 앤, Anne of Green Gables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

캐나다 작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Anne of Green Gables"는 1908년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얻었다. 17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아생전에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배경이 되었던 Prince Edward Island는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캐나다 동부의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김유경 씨가 번역한 "빨강 머리 앤 1 - 만남"을 읽고, 책의 배경이 되었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방문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Anne of Green Gables Museum에서 찍은 1908년 출판될 당시의 책


100년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고, 그녀의 작품 무대가 되었고, 결혼 전까지 살았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휴가차 방문하게 되면서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였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 앤 셜리가 세상 사람들이 불우하다고 말하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앤 셜리가 자신의 빨강머리처럼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가지고, 무색의 애번리와 캐번디쉬를 채색하는 느낌을 받았다.


앤의 재잘재잘 쉼 없이 떠드는 말속에는 그녀의 솔직한 감정이 담겨있고, 현재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들을 공상으로 늘 멋지게 바꾸며 그것을 향해 성장하는 모습들,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직면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들, 자신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친구들, 사람들, 자연들을 소중하게 가꾸는 모습들이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빛나는 호수처럼 빛나 보인다. 이는 오늘날 사회에서 요구하는 획일화된 좋은 인간 유형(늘 웃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 등)을 벗어나 우리 각자가 앤의 빛을 보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도록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앤 셜리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핵심 요소인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의 삶을 찾으려고 할 때, 익숙한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이 불안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밝은 희망보다 먼저 밀려드는 상황이 점점 많아질 때 필요한 것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이라는 것을 요즘 많이 깨닫는다. 이러한 점에서 빨간 머리 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을 가지도록 초대하는 것 같다. 먼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책의 주인공으로 고아와 빨간 머리로 설정한 이유를 찾아보고, 책 속에서 나오는 세 가지 인상 깊은 장면들을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Anne of Green Gables Museum에서 찍은 어릴 적 모드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 사진을 본다면 매슈와 머릴러가 연상될 것이다.


고아


고아는 자신을 책임져줄 사람, 흔히 부모가 없는 아이를 가르키며, 흔히들 불우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국어사전에 '불우하다'는 '하늘이나 신이 도와주지 아니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딱한 상태 혹은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남의 판단을 들으면서 살아간다. 특히 이런 판단들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을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가족들의 부정적이며 판단적인 말들은 가슴에 새겨질 정도로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고아라면 자신을 키워주고 지켜줄 부모가 없어서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을 받을 확률이 극히 낮아지기 때문에 성장해서도 힘든 것은 아닐까? 비단 생물학적 고아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편애, 부모의 이혼과 재혼,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경우에도 "불우하다, 혹은 버림받았다"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힘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에 남들이 불우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고아로서 성공한 사람들을 대단한 사람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Anne of Green Gables Museum에서 전시한 1874년부터 1910년까지의 몽고메리의 삶

루시 모드 몽고메리도 자신을 고아로 생각한 것 같다. 그녀의 엄마는 생후 21개월쯤에 병으로도 세상을 떠나고, 자신만 남겨 놓은 채 아버지는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재혼을 하며 살아간다. 모드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캐번디쉬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8살까지 말동무할 친구 없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학교에 가서도 다들 아빠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는데 자신은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외롭게 만들고, 아빠가 나를 두고 떠났다는 사실은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해 본다. 이런 점에서 비록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더라도 자신을 고아라고 느끼며, 책의 주인공을 고아 소녀로 설정했다고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버림받은 고아라 하더라도 당당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빨강 머리 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빨강 머리


앤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아에다 빨강 머리를 가진 소녀로 그녀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빨강 머리"(주석 13)는 그 당시 문화적 배경이 금발과 흑발을 가장 아름다운 머리로 간주했고, 크리스천이었던 모드가 성경 속의 가장 안 좋은 인물들이(동생을 죽인 카인과 예수를 배반한 유다) 가지고 있던 빨강머리를 앤의 머리카락 색으로 설정한 것은 불우한 사람 중의 불우한 사람이 바로 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수 있다. 결말 부분에 머리카락 색깔이 금갈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더라도 빨강머리는 불운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처럼 불우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을 '빨강머리 앤'으로 제목 짓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책 원본 제목대로 초록지붕 집의 앤이 맞다. 하지만 일본에서 먼저 번역한 이유와 만화로 인해 '빨강머리 앤'으로 너무 알려져 버려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Green Gables의 앤의 방. 주름진 드레스며, 세면대이며, 앤이 이 방에서 첫날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울면서 잠들어 버린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과 인식에 대한 해방


모드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은 행복과 낙관주의를 뿜어내고 있다' 어느 서평에 씌어 있는 말이다. 그것을 쓸 때 깃들었던 걱정, 우울, 괴로움 따위의 정신상태를 생각하면 참으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고맙게도 내 인생의 그림자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하다. 나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낙관주의를 전하는 사람, 태양처럼 밝게 비추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기 1 339p).

캐번디쉬에서 바라본 석양


모드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꾸었을까? 그녀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었다. 자기 해방의 글쓰기처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일기를 썼고, 늘 노트를 옆에 두고,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을 묘사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시를 적었다. 이런 자신의 삶과 글쓰기를 통해 역작인 '빨강머리 앤'이 탄생하였고, 수 천만명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 즉 자신의 불우한 환경이 모티브가 되어 자신의 부정적 인식의 해방에 큰 역할을 한다. 신은 공평하게 각 개인에게 행운과 불운을 함께 준다는 말이 떠오른다.

몽고메리가 소설 앤을 쓰기 시작할 때 구입한 타자기. 타자기에 적힌 알파벳의 페인트가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벗겨져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자신의 불우한 상황도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이름 짓기이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붉은 흙들과 호수라고 할 만큼의 잔잔한 파도들, 햇빛이 비칠 때 반사되는 은빛의 물결들, 곳곳에 개울이 흐르고, 온갖 새소리들과 봄, 여름, 가을이 되면 갖가지 피어나는 꽃들과 식물들이 그녀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었고, 그녀 스스로도 꽃이며 산책길이며, 나무에 이름 짓기를 좋아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자연들이 그녀에게 의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녀가 15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1년 동안 머물러 있을 때도 늘 그리워했던 것도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었고, 결국 돌아오게 된 배경도 이 때문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여러 측면을 봤을 때, 그녀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해방시킨 것은 글쓰기, 아름다운 자연환경, 주변의 사물에 의미 부여하기(이름 짓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책 앤에서도 나타나는데 글쓰기는 쉼 없이 재잘거리는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공상과 사물에 이름 짓기로 드러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인식을 드러내는 앤의 세 가지 명장면들


1.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자


매슈가 앤이 자신들이 원한 남자아이가 아님을 알고서도 기차역 앞에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앤은 매슈와 머릴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음에 절망한다. 이 장면은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다.


소녀는 소리 질렀다.
"나를 원치 않으신다고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어서 바라지 않는단 말씀이죠! 이런 일이 생기라는 것쯤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제까지 나를 바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모든 일이 너무 근사해서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쯤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울고 싶어!"
소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말하더니 이윽고 울기 시작했다. 식탁 옆 의자에 앉아 두 팔을 테이블 위로 내던져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머릴러의 놀라움>, p50)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앤이라면 그 상황에서 매슈와 머릴러에 소리 지르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거 같다. 매슈와 머릴러가 앤의 생존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철저히 아무런 힘이 없는 앤이 소리치며 엉엉 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보통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매슈와 머릴러의 처분만 기다리거나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애원할 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앤은 이 장면에 엉엉 소리치며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소리쳐 말해버리고, 그에 대해 애도함으로써 그 부정적인 인식을 떨쳐버리는 모습을 본다.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이 대사만 봐도 가슴이 아파오고, 이것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이 대사를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몽고메리는 확실히 자신을 고아로 생각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이 말하는 어른이 되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늘 웃는" 감정만 표현하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슬픈 감정, 기쁜 감정도 스스로 남을 위해 절제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나? 슬픈 감정이 계속 쌓여만 가고, 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쌓여만 가는, 결국 이러다 내 마음속에서 썩어버리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앤을 보면서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어제 그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어나 창문으로 비치는 벚꽃 하며, 주위에 만발한 꽃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그녀는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앤이 뿜어내는 긍정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앤처럼 마음껏 나의 슬픈 감정도 즐거운 감정도 표현하고 싶다. 그 누구 앞에서라도.


슬플 때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슬퍼하자. 기쁠 때 애써 기쁨을 줄이려고 하지 말고 마음껏 기뻐하자.


2. 자신에 대한 판단은 나만이 할 수 있고, 누구도 나 자신에 대한 판단을 하도록 허용하지 말자.


린드 부인이 앤보고 "빼빼 마른 못생긴 아이로군요... 맙소사! 주근깨가 이렇게 많을 수 있담. 머리털은 꼭 당근같이 새빨갛구나."라고 말했을 때, 앤은 발을 구르며 얼굴에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 질렀다. " 당신 같은 사람은 싫어요! 싫어, 싫어--정말 싫어--"라고 말한다. 머릴러가 앤을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한 지 며칠 만에 이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머릴러가 앤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봤을 때,

앤은 울며 말했다.
"나 자신이 말하는 것과 남에게 듣는 것은 크게 달라요. 스스로는 그렇게 알고 있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기를 바라죠. 머릴러는 내 성질이 고약하다고 여기겠지만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고 숨이 콱 막히는 듯해서 잠자코 있을 수 없었어요."

이 장면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앤 이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의지와 그것을 건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즉시로 반응하며 불편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나올 수 없고, 늘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 자신을 부정적인 판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앤의 모습은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상대방이 가진 힘에 따라 혹은 뒤따르는 대가가 두려워서 아무 말 못 하고 삼켜야만 되고, 그것을 성숙하다는 의미로 치부해 버리는 사회에 대해 "나를 존중해!"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존엄을 지키는 것을 반복할수록 나의 주체성을 살아나지 않을까?


3. 내 삶의 소중한 것들에 의미 부여하며 소중하게 대하기.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소녀는 속삭였다.
"아, 커스버트 씨, 우리들이 지나온 그 새 하얀 길, 그곳을 뭐라고 불러요?"
어디를 말하는 걸까하고 매슈는 잠시 생각했다.
"아, 그 '가로수길' 말이냐? 아주 예쁜 곳이지."
"예쁘다고요? '예쁘다'라는 말만으로는 어울리지 않아요. '아름답다'로도 모자라요. 어떤 말도 모두 어림없어요. 아, 마치 꿈 같았어요! 상상의 세계보다도 멋진 곳을 처음으로 봤어요. 여기가 뿌듯해지는 것 같았어요."
....
"그토록 아름다운 곳을 '가로수길'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런 이름은 아무 뜻이 없어요. 무라고 하면 좋을까....그래, '환희의 하얀 길'. 상상이 펼쳐지는 듯한 이름이지요?"


앤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꽃들, 오솔길들, 숲들에게 '환희의 하얀 길','연인의 오솔길', '윌로 미어', '제비꽃 골짜기' 등으로 이름을 지어주며 사랑한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 속에 의미 있는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자신에게 늘 긍정적인 인식을 주는 상대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앤은 그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더욱이 자신을 아껴주는 다이애너나 매슈와 머릴러에게 받은 사랑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이런 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흘러 갈수록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지나쳐 가지만, 그것들에 느끼는 처음의 감탄과 놀라움은 점점 줄어드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앤처럼 나에게 소중한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소중히 대할 때 나 자신을 소중히 대하게 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현재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앤에서 발견한 세 가지를 삶에 잘 적용한다면 내 삶은 캐밴디쉬처럼 좀 더 색깔 있는 모습으로 채색되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