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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우 Mar 10. 2022

#10 여자친구

독서모임

 이사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여자친구와의 만남에 대해서 한 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치유일기든 일상 이야기든 자주 등장하게 될 테니.




 30대 초반에 한 친구와 1년 반 정도 만나고, 그 뒤 30대 후반 때까지는 솔로로 지냈다. 중간에 짧게 짧게 만난 사람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 살던 집은 성수동에 있는 반지하집이었는데 크기가 괜찮았다. 이곳에서 새끼 길냥이를 만나 7년을 함께 살았다. 5분만 걸으면 한강이 나왔고 월세도 안 나가서 딱히 이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썸 타던 여사친을 집에 초대하고 나면 그때부터 연락이 두절되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이 원인인 것 같아 반지하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다음 집은 상왕십리. 지상에 있는 집이었다. 2호선 라인이라 어딜 가기에도 좋았다. 이제는 썸녀를 집에 초대해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중고차도 한 대 장만했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차는 있어야 데이트할 때 수월할 것 같았다. 물론 여자친구는 없었다. 그래도 유비무환이라고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상왕십리 집의 주인은 바로 위층에 살았다. 오며 가며 자주 마주쳤는데 별 잔소리 없이 친절하셨다. 그러다 그곳에서 산 지 한 1년 반 정도 지났을까.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만나는 여자 없냐고 물어왔다. 하긴 여자사람친구가 집에 놀러 오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애인 없으면 내가 소개 좀 해줄까?"


 뜬금없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별생각 없이 그러시라고 했다. 며칠 뒤 주인아저씨는 집을 찾아와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카톡을 열어보니 여자의 얼굴 사진이었다. 귀염상에 상당히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그런데 한국 여자가 아니었다. 스무 살의 베트남 여자라고 했다.


"베트남 여자도 괜찮어. 스무 살짜리 여자를 마흔 살이 어떻게 만나겠어?"

"..."

"한 달에 200은 넘게 벌지?"

"그.. 그렇죠"

"그럼 됐어"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했다.


"얘는 저 만나는 거 괜찮대요?"

"어, 사진도 보내줬는데 오케이 했어"


 알고 보니 이 친구의 언니가 한국 사람이랑 만난다고 했다. 이 친구는 지금 베트남에 있지만 나만 좋다고 한다면 한국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다. 사실상 매매혼이었다. 오랫동안 솔로라 사실 굉장히 외롭긴 했는데 그렇다고 한국 여자를 만나는 것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나는 괜찮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깔깔대며 웃어댔지만, 가족은 너를 도대체 어떻게 본 거냐며 기분 나빠했다.


 이때쯤에는 여자에게 어필하는 전략을 수정한 상태였다. 과거엔 내가 마음이 생기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직진만 해댔었다. 30대 초반에는 그게 먹혔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아닌 감독 지망생이라는 현재 상태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일명 가랑비 전략. 오는 둥 마는 둥 하는 비에 옷이 어느새 젖어가듯,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전략이었다.


 그동안엔 테니스 동호회에서만 여자를 찾곤 했는데, 모든 동호회가 그렇듯 그곳도 일종의 계급사회다. 테니스 실력으로 나뉘어진 계급사회. 금배, 은배, 동배, 신인부. 테니스 잘 치는 남자들이 인기가 많았고, 아무래도 운동 동호회다 보니 건강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했다. 내 테니스 실력은 동배와 은배 중간 정도였고, 키도 작은 편이라 딱히 여자에게 어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몇 명의 여자와 썸을 탔지만, 안정적이지 못 한 직업 때문에 사귀는 데까지 가기에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호회도 해보기로 했다. 바로 독서모임. 장르소설만 읽는 편독 습관을 고쳐보고 싶었고 다른 테두리 안에 있는 여자 사람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독서모임은 테니스 동호회와는 느낌이 달랐다. 아무래도 독서모임은 몸 좋고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활동적인 편인 내가 그곳에서는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외모가 눈에 띄게 이뻤고 모든 대화에 리액션이 굉장히 좋았다. 처음부터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친해지는 것과 사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성급하지 않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녀에게 다가가야 했다. 부담가지 않게 편하게. 그 전략은 통했다. 여자친구는 편한 남자를 좋아했다.


 여자친구와는 시작부터 불꽃 튀는 연애를 했다. 내 눈에는 너무 예쁜 사람이었고, 이 사람을 놓치면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현실 문제가 걸렸다. 여자친구는 결혼을 원했다. 나는 결혼 준비가 안 된 사람이었다.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못 한 상황이었고, 입봉을 하지 못 해 굉장히 스트레스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다. 여자친구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싸웠다. 나는 내 꿈을 인정해주지 않는 여자친구가 야속했고, 여자친구는 마흔이 넘고도 꿈을 좇는 나를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내가 졌다. 사실 어느정도 지친 상황이기도 했다. 다음 해 3월까지 입봉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취업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제 와서 어디에 취직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해 2월이 되자 허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졌다. 갑상선암 척추 전이였다. 둘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취업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갑상선암 수술, 방사성 요오드 치료, 방사선 치료, 요양 때까지 여자친구는 곁을 지켜주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을 텐데도 다행히 이별을 통보하지는 않았다. 나보고 딴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건강부터 챙기라고 했다.


 장성에서의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했다. 이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여자친구에게 말하자 여자친구가 대뜸 말했다.


"그럼 같이 이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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