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수 May 02.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58장: 미스젠더링

간편하고 치명적인 모욕

[58장: 미스젠더링]



우리는 칭찬받기보다는 모욕당하기가 훨씬 더 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 창을 잠깐만 열어봐도 각종 sns나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 등의 사람들은 시시각각 누군가를 헐뜯고 조롱하기에 바쁘다. 정당하고 건전한 비판이라면 환영이지만, 사실 비판이라는 것도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에 비해 모욕은 준비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의 성취나 업적을 깎아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만약 상대에 대해 아는게 없다면 그제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모욕을 할 수 있다. 흔히 ‘인신공격’ 이라고 하는 것. 눈에 보이는 외모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방법이다. 아주 유치하고 저열한 짓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주로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줄곧 모욕의 대상이 되곤했다. 체격이 눈에 띄게 왜소하거나, 뚱뚱한 체형을 가졌거나, 이목구비나 피부색이 사회적 미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던가 등등. 특히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 많이 쓰였다. 어렸을 때야 뭐, 그런 표현들이 직설적으로 나갔지만, 사회화된 ‘어른’들은 조금 더 그럴듯한 방식으로 세련된 척을 하며 저열한 모욕들을 하곤 한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그 모욕의 대상은 여전히 ‘남들과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장애인,흑인,이주민,어린이,노인 등을 모욕하는 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아, 이런 표현들은 특정 개인에게 행해진다 하더라도 그 집단 전체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혐오발언(hate speech)’ 이라고 일컫는다. 혐오발언을 강력히 제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세계 이곳저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추세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어떨까? 트랜스젠더를 모욕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이 원치 않는 성별(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성별)로 지칭하는 것이다. 트랜스여성을 남자라고 지칭하고, 트랜스남성을 여자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도 모욕을 줄 수 있다. 이것을 바로 미스젠더링(misgendering)이라고 한다. 미스젠더링이 왜 모욕이 되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잘못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실례인데, 하물며 온갖 고충과 사회적 낙인을 감수하며 확립한 성별정체성을 부정하는 표현으로 호명한다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모욕이며 심각한 혐오발언이다. 트랜스젠더의 인권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이 미스젠더링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인칭대명사 그(he), 그녀(she)를 많이 쓰는데, 이것은 트랜스젠더에게는 꽤나 민감한 문제다. 그래서 미스젠더링 방지를 위해서 상대를 호명하기 전에 먼저 어떤 인칭대명사를 쓰는지 물어보거나, 혹은 자신이 먼저 소개하고는 한다. 지정성별과 상관없이 자신을 남성으로 정체화했으면 he/him, 여성으로 정체화했으면 she/her, 남성도 여성도 아닌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정체화했으면 they/them을 쓴다. (they/them 같은 경우 3인칭 복수로 쓰이면 ‘그들’ 이라는 뜻이지만, 3인칭 단수로 쓰이면 특정 개인을 성중립적으로 지칭하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성별을 모르는 사람을 호명하고 싶을때도 이 대명사를 쓴다.)     


[*트랜스젠더를 개명 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데드네이밍(deadnaming)’ 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미스젠더링과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표현이다.]  

  

한국어에서는 구어체로 직접 그/그녀라고는 잘 안하지만, 우리도 역시 사람을 지칭할 때 성별표현을 많이 쓰기는 한다. “2번 테이블에 남자 두분 오셨어요~”, “그건 저쪽 여자분한테 갖다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는 아무래도 성별정보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싶어 하)니까, 사람을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효율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성별이니까 그런것일테다. 하지만 내가 줄곧 말해왔듯이 사람의 성별은 두 개로만 나눠지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으로는 성별을 알 수 없으며, 까딱 성별호칭을 잘못 사용하게 된다면 심각한 무례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의 성별판단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 머리가 짧은 남자, 머리가 길면 여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식으로 – 언제든 예외는 존재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트랜스젠더에게 고의로 미스젠더링을 하는 것에는 반대할 것이다. 그러하다면 언제 어디서든, 실수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사회와 문화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성별판단을 하지 말라는게 아니다. 성별을 구분하는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도 아니다. 성별다양성을 존중한다는건 성별이라는 정보값을 무의미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별이라는게 너무나도 중요하니까 (나같은)누군가는 목숨걸고 수천만원 들여가며 수술까지 하는 것 아니겠나. 성별이 중요하니까, 그 중요한걸 섣부르게 단정짓지말고 신중하게 판단하자는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성별을 소개할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혹은 해외처럼 어떻게 호명되고 싶은지 물어보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주변정보를 통해서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지정성별과 불화하는 지점이 있는지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 정도의 신중함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예를들어 당연히 대학을 나왔을거라고 전제하고 묻는 “몇 학번이세요?” 라는 질문이나, 당연히 이성애자일거라고 전제하고 묻는 “여자/남자 친구 있어요?” 같은 질문이 실례인것처럼 말이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transarmy?mibextid=ZbWKwL

나야 뭐 하도 많이 당하는 일이라 무뎌지려고 노력중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 당사자에게 미스젠더링이란 단순히 호칭을 잘못 부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험이다. 수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부정당하며 고통받고 있고,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한 이후에 성별정체성을 존중하는건 대단한게 아니라 그냥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이 만약 트랜스젠더를 지지하고 싶다면, 트랜스젠더의 인권증진에 기여하고 싶다면 미스젠더링을 저지르지 않고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해 힘써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트랜지션 일기> 57장: 언제부터였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