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살아가는 자들
※ 본 글은 트랜스젠더 혐오발언이 담긴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숙명여대 입학거부 사건, 변희수 하사 강제전역 사건 이외에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우리 사회에 일상적으로 너무나도 만연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트랜스젠더들이 가족관계 및 인간관계, 학교, 직장, 관공서 이용 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거나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의 경우 반 배정이나 교복 등 철저하게 남녀로 분리된 학교 시스템에서 끊임없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교사나 주변 학생들로부터 혐오발언을 듣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학교 밖 청소년이나 학교를 졸업한 성인은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성별이분화된 노동시장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성별을 적어야 하는 이력서부터가 난관이며, 어찌어찌 면접까지 간다고 해도 서류상 성별과 성별표현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성별정정을 하지 못한 상태라면 주민번호가 필요한 상황이나 관공서를 이용할 때마다 차별과 불편함을 겪는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학생들 간의 동질성은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우리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지정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묶인 여자/남자학교든 그렇지 않은 남녀공학이든 ‘사실 내가 느끼는 나의 성별은 여자/남자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나머지 학우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다.한국사회는 성소수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메시지가 점점 더 넘쳐나고 있음에도, 학교에서는 ‘사회엔 다양한 젠더가 있고 이를 이류로 차별해선 안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언제 비난과 따돌림, 조롱의 대상이 될지 모르는 학내에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들이 ‘나’를 드러낸다는 건 갑옷도 입지 않은 채 전쟁터에 나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재학 중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과 관련해 힘들었던 점에 대해 물은 질문에서는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성정체성에 맞지 않는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것’(52%)을 꼽았다. 그러나 청소년 트랜스젠더를이 더욱 힘들어하는건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지않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59%)이었고, 애초에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하는 분반이나 학번, 자리 배치와 같은 기본적인 시스템(60%) 자체가 고통이라는 응답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문제점을 뛰어넘어 청소년 트랜스젠더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건 다름 아닌 ‘성소수자 관련 성교육의 부재’(60%)였다. 한국의 학교에선 성소수자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다. 의무적으로 하는 성교육은 주로 남녀의 신체 차이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성범죄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게 일반적이다.
민나리 외,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 中
트랜스젠더들이 일상에서 수많은 혐오와 차별에 노출이 되고,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다보니 정신건강과 생계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청년층 생활실태 및 복지욕구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청년의 건강 및 심리상태가 비성소수자 청년에 비해 훨씬 부정적으로 파악된 가운데, 성소수자 중에서도 특히 트랜스젠더 집단의 정신건강이 가장 위태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 중 트랜스여성의 58.7%, 트랜스남성의 59.7%, 논바이너리/젠더퀴어의 62.9%는 최근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응답 또한 다른 응답자들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트랜스여성 응답자들 가운데 20.2%는 최근 1년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훼손하는거니까 건강하지 못한게 당연한거 아니겠냐고, 트랜스젠더의 수명이 짧은것도 그래서이지 않냐고 말이다. 실제로 트랜스젠더의 수명이 짧다는 이야기가 많고, 나 역시도 중년을 넘긴 트랜스젠더의 사례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마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자살을 많이 하기 때문이고, 혹은 자살을 하지 않더라도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패닉 살해’ 라는 말이 있다.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자신이 연애적·성적 대상으로 여겼던 여성이 트랜스여성임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과 분노에 빠져 그 대상을 살해하게 되는 경우다. 얼마나 비일비재하면 용어까지 있겠나. 해외에서 건너온 말인데 우리나라에도 이슈가 안되었을 뿐 이런 사례가 있다. 그러한 남성들은 성확정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여성의 외부성기를 확인했을 때 ‘속았다’ 고 생각하여 분노를 느낀다는 것인데, 이는 트랜스여성을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트랜스혐오에 기반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여성을 지배와 착취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남성성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산물이자 게이남성을 비하하고 조롱해 온 남성문화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트랜스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남성은 게이나 여성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장 많이 접하는 혐오는 ‘과도한 여성성 수행’ 이라는 이미지다. 겉보기에도 남자같은 사람들이 어색하고 과장되게 화장을 하고 ‘여장’을 모습이 기괴하다거나, 여성들은 여성에게 주어진 성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하려고 하는데 트랜스젠더들은 자신들을 여자라고 여기면서 오히려 그걸 강화하는거 아니냐는 비난이다. 이에 대해 나는 항상 할 말이 많다.
전자와 후자는 혐오의 맥락이 조금 다르긴한데,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같다. 그들은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젠더바 같은 유흥업소 종사자를 떠올리는거 같다. 물론 실제로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유흥업소나 성매매 같은, ‘음지’라고 불리는 곳에서 종사하고 있는건 맞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생계와 존엄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을 하며 삶을 꾸려가고 있고, 그건 ‘음지’라 불리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생계비 뿐 아니라 수술비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차별과 혐오로 인하여 일반적인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보통의 업종들도 마땅히 기대되는 덕목이나 외양이 있기 마련인데, 유흥업소에서도 당연히 그런게 있을 것이다. ‘과도한 여성성 수행’도 그 맥락에서 나오는 것일테다. 양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음지로 밀려나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인데 그걸 비난한다는건 너무 가혹하고 모순적인게 아닐까.
또 하나, 트랜스젠더 중에서는 유흥업소에 종사하거나 ‘과도한 여성성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고, 내가 만나봤던 트랜스젠더들도 거의 그랬다. 나는 남들에게 말하면 ‘좋은 일 하시네요’ 라는 소리를 듣는 사회복지 쪽에서 종사를 했고 평소에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으며 치마보단 바지를 입는 날이 더 많다. 내가 만나봤던 트랜스젠더들도 모두 다양한 업종에서 일을 하며 다양한 외모와 옷차림을 하고 있다. 욕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것처럼 과도한 여성성에 집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여성성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게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트랜스여성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여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여성이라고 정체화했다고 해도, 끊임없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하는 압력을 받는다. 어떻게든 남자가 아님을 보여주려면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고 예쁘장하게 꾸며야만 사람들은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구나’ 하고 생각한다. 트랜스젠더가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당사자가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트랜스젠더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결국엔 다 핑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이러해서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해롭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냥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싫은데 그냥 싫다고 하긴 뭣하니 그 뒤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뭐가 되고싶은게 아니라 그냥 살고싶은거야”
트랜스여성이 주인공인 <천하장사 마돈나>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을 바꾸는게 아니다. 여성이 되기로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오늘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