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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절주절 신씨네Cine Jan 27. 2019

고난을 극복하는 관계의 아늑함 <로마>

세월이 흘러 과거를 되돌아보면 대체 무슨 느낌일까. 아직 나는 나이가 어려 명확히 감을 잡을 순 없다. 그러나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를 보고 희미하게나마 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삶이 아님에도 마치 내 삶처럼 생생하게 머리와 가슴을 때린다.

 

<로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들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주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요 몇 년 간 한국 극장에서 개봉했던 <칠드런 오브 맨>(2006), <그래비티>(2013) 두 작품만 보더라도 감독은 ‘아늑한 관계’의 힘을 밝혀왔음을 알 수 있다.


위태로운 삶 위에 선 주인공 설정부터 그렇다. 아들이 죽은 후 삶의 의지를 버린 채 무의미한 생활을 이어가는 <칠드런 오브 맨>의 테오도르(클라이브 오웬), 광활한 우주공간에 홀로 남겨진 <그래비티> 속 라이언 스톤(산드라 불럭). 그들은 한 사건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고 말았지만 기어코 세상과의 관계를 향해 뚜벅뚜벅 향해 간다. ‘모든 기호의 의미는 관계에서 나온다’던 언어학적 관점으로 이를 바라보면, 사람 또한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마치 관계라는 것에도 인력이 있는 듯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진 <로마>도 앞선 작품들의 분위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앞선 작품들이 표면적으로 SF 장르를 택하면서 관객들에게 영화적 체험을 느끼게 했다면, 이번엔 카메라의 역동성을 줄여 조용한 시선으로 감독의 추억여행 속으로 관객들을 조용히 안내한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관람 전에는 으레 <로마>가 감독 본인의 기억이 투영된 1인칭 시점을 차용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데서 다소 의외였다. 이 선택은 알폰소 쿠아론 자신 또한 카메라 바깥에서 관객들과 함께이고 싶다는 의지처럼 여겨진다. ‘내가 어릴 때...’라는 식의 회상은 이야기꾼 본인의 감정이 과도하게 들어갈 위험이 있는 방식이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덕분에 이 감상에 동행하는 관객들은 보다 깊게 작품 속에 몰입한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멕시코 중산층 가정의 풍경을 그려낸다. 의사인 안토니오(페르난도 그레디아가)-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 부부, 그들의 네 자녀, 외할머니 테레사(베로니카 가르시아)의 일상. 따스하고 포근한 흑백 비주얼이 추억보정을 일으켜서 인지 그 모습은 꽤 멋지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들의 편한 삶을 뒤에서 도와주는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일상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매일 새벽 알람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지런을 떨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삶. 그럼에도 클레오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즐기며 나름 만족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은 갑자기 위기를 맞게 된다. 클레오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남자친구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은 무책임하게 떠나고 심지어는 뱃속 아이마저 사산하고 만다. 더불어 주인마님 소피아도 외도를 저지른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만다. 이 대목에서 당시 멕시코의 시대상을 혼란한 사회상이 겹쳐지면서 개인적 비극과 사회적 비극을 동치 시키는 시퀀스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감독은 클레오-소피아의 위기를 함께 그려내면서 ‘이들의 삶 형태는 다를지라도, 모두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역설하는 듯 보인다. 이로써 느껴지는 유대감은 무척이나 끈끈하다. 

 

이 끈끈함은 클레오와 소피아, 그리고 소피아의 네 자녀가 함께 여행을 떠난 베라크루즈 해변에서 정점을 찍는다. 아이들이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위험에 처하자 클레오는 자신이 위험해지리라는 생각은 뒤로 미뤄둔 채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어렵사리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으로 걸어 나온 클레오를 향해 소피아는 “우리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부둥켜안는다. 마치 그 어떤 폭력이든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클레오와 소피아 사이의 높은 벽이 허물어짐을 느낄 수 있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시그니처와 같은 화려한 카메라 연출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곳곳에서 메시지를 빛내주는 연출법을 활용한다. 특히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는 다리가 고정된 채로 패닝하거나 틸트 업다운만 반복하는데, 이 정적인 연출은 마치 ‘내 삶은 흔들려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강하게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가 내게 이처럼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최근 사회에 만연한 갈등의 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제적인 차이 뿐 아니라, 지역, 남녀, 인종별 갈등이 사람간 유대감을 더욱 희미하게 한다. 어쩌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지금 이 시점에 이 작품을 선보임은 이기적인 현대인들을 향한 따끔한 일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로마>가 던진 이 잔잔한 감동이 우리 사회에 변화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지 살포시 기대를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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