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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Jan 17. 2021

2019년, 강북 오빠들의 수다

강남오빠가 되어가는 큰딸의 남편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서로의 근황을 물은 뒤 다섯 남자의 수다는 자연스럽게 부동산 이야기로 이어졌다.


건축을 전공한 정재는 3년 전부터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무척 바쁜 눈치였다. 자유로운 영혼인 정재는 아직도 싱글이었다. 유명 건축 관련 잡지에서 일을 하다가 공간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공간기획'이라니 그게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듣기에도 그 녀석만큼이나 멋지게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있었던 정재는 책도 만들고 건축 관련 워크숍, 지방 도시를 돌아다니며 도시개발, 도시재생 관련 컨설팅도 한다고 했다. 건축, 도시 분야에서는 꽤 알려진 모양이었다.


정재 아버지는 동네 상가에서 전파사를 하셨는데, 전파사가 있는 상가건물이 전면에 있었고 가운데에는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안쪽에 주택이 있었다. 주택은 반지하와 지상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정재네가 2층에 살고 반지하와 1층은 세를 주고 계셨다. 정재네 집에 놀러 가면 늘 사람들로 붐볐다. 인심 좋으셨던 정재네 부모님은 세입자 분들과도 식구처럼 지내셨다. 종종 거실에 커다란 상을 펴놓고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정재는 30살에 독립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집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겨울이면 어머니와 장독을 묻고 여름이면 여동생과 같이 세를 살던 집의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을 받아놓고 물놀이를 했다. 이갈이를 할 무렵에는 흔들리는 이빨을 실로 묶어 문고리에 걸어 놓고 문을 여닫으며 서로 이빨을 빼주었다. 그리곤 옥상 굴뚝으로 빠진 이를 던지곤 했다. 그때는 모두가 함께 나누며 함께 성장했다.


정재는 30살에 독립을 한 이후, 홍대, 합정동, 망원동, 연남동 같은 트렌디한 곳에서만 살았다. 2016년 사업을 시작한 이후, 줄곧 연희동에서 살고 있다. 몇 달 전 연희동 빌라를 두 채나 샀다. 위아래층을 한꺼번에 샀는데, 하나는 갭 투자를 해서 친구에게 세를 주었고, 하나는 본인이 살고 있다. 부모님이 어릴 적부터 임대를 통해 소득을 창출하신 걸 보아왔고, 건축을 전공해서 주택의 자산적 가치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사업을 하기 위해서 부동산을 통한 자산증식은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정재의 꿈은 연희동에 지인들과 함께 모여서 사는 거라고 했다. 굳이 약속을 하지 않아도 동네를 오가다 마주치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런 일상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마 자신은 부모님 댁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마당에 대한 추억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파트에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정재는 큰딸 남편의 친구 중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 본 적이 없는, 아마 앞으로도 살지 않을 유일한 친구였다. 정재가 건축학과에 다닐 때도 같은 학번에서 아파트 거주 경험이 없던 유일무이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건축학과 교수님들도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실 정도였다.


상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심 상수가 부러웠다. 큰딸의 남편도 실은 한국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그래서 영어공부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대학교 때 외국인 기숙사에 운 좋게 들어가 외국인이나 교포 친구들과 지내면서 외국문화에도 익숙해졌었다. 하지만, 홀로 계신 어머니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상수는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친구들은 상수가 미국에서 정착해서 잘 사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2014년 어느 날 귀국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상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니 더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 가까이에서 살고 싶었다고 했다.


상수는 학교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구했는데, 강북 뉴타운 재개발 사업지구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 다닐 때 빽빽이 있던 낡은 다세대 주택들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반듯반듯한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다행히 비슷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듯해서 안심이 되었다. 아주 잘 사는 사람도, 아주 못 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 나이 또래도 비슷하고 깨끗한 단지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2년마다 전세 보증금이 올라 전세 거주 4년 만에 반전세로 전환을 해야 만 했다. 전세 재계약 때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얼마를 더 올려달라고 할까... 집주인이 재계약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가슴 조리며 부동산에 가야 했다. 주거비용이 좀 더 저렴한 서울 외곽으로 나가야 하나 와이프와 고민을 했지만,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과 학교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겪은 변화 때문에 아이들한테 늘 미안해하고 있었다. 비단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아이들이 어리니 괜찮겠지 했지만, 예민한 큰 아이는 아직도 가끔 미국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곤 했다.


상수는 처음으로 집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자기가 인생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실패자 같은 패배감에 쌓였었다고 했다. 주택의 자산적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하루빨리 지옥 같은 주거 불안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에서 집은 꼭 소유해야 하는 거였다.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최대한으로 받아도 집을 사기엔 부족했다. 주택 가격의 20%에 해당하는 보증금만 있으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한 주택담보대출이 가능한 미국과 금융시스템이 많이 달라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주택담보대출기간이 보통 30년인 미국에서는 매달 조금씩 월급에서 갚아나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내 형편에 맞추어 집을 장만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가족의 도움 없이는 주택을 구입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2019년 봄, 같은 아파트 단지에 드디어 '내 집'을 마련했다.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인생에서 커다란 숙제를 끝낸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아빠로서 뭔가를 해주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신문사에 다니는 태현이는 일찍부터 주택의 자산적 가치에 눈을 떠 30대 초반에 암사동의 재건축 아파트를 샀다. 재건축이 끝났지만, 입주를 할 경제적인 여유는 아직 없어서 계속 전세를 주고 있다고 했다. 아직 결혼 전이었고, 부모님과 같이 생활을 해서 빠듯한 월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매달 받는 월급의 대부분을 주택마련에 쏟아부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 같은 월급쟁이가 어떻게 서울에 주택을 마련할 수 있겠냐고 했다. 지금은 회사소유의 빌라에서 와이프와 아들과 함께 전세를 살고 있고 주변환경도 좋아 나름 만족하고 살고 있다. 부동산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던 태현이가 그렇게 일찍 주택을 장만했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태현이는 부동산에 빠꼼이였던 큰 이모 덕분에 주택의 자산적 가치에 일찍 눈을 떴다고 했다. 외가 쪽 친척들은 대부분 큰 이모를 따라 일찍 강남의 아파트에 투자를 해 재테크에 성공했다고 했다. 큰 이모는 1970년대 중반에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샀고, 계속해서 잠실의 아파트에 투자를 해서 임대수익으로 편안한 노년을 살고 계시다고 했다. 태현이 부모님도 큰 이모의 권유로 잠실의 작은 아파트를 소유해 전세를 주고 있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자신의 부모님들은 아마 큰 이모가 아니셨으면, 지금까지 성북동의 단독주택에서 쭈욱 사셨을 거라고 했다. 태현이 동생내외도 잠실에서 살고 있는데, 교육환경이 좋아서 절대로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태현이도 아이가 크면 잠실로 이사를 가야하나 고민은 좀 되지만, 전세가격이 워낙 높은 동네라서 그게 가능할 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택은 그에게 '삶의 바탕'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셈이라고 했다. 자신은 큰 이모처럼 부동산 투자를 해서 수익을 창출할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집을 한채 마련하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그래서 솔직히 주택 가격이 오르면 좋겠다고들 하지만, 그 집을 팔지 않는 이상 나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혜택은 전혀 없고 내야 할 세금만 올라간다고 했다. 제발 주택시장이 안정화돼서 세금 좀 덜 냈으면 좋겠다는 말에 다들 박장대소했다. 집을 소유했건 소유하지 못했건 간에, 어떤 이유로든 모두가 주택시장이 안정화되기를 바라는 거다.


제주도에 내려 가 살고 있는 승규가 마침 서울에 올라와서 함께 자리를 했다. 승규의 제주살이를 모두들 부러워하고 있었다. 승규 부모님은 전라도에서 1960년대에 서울로 올라오셔서 세운상가에서 사업을 꽤 성공적으로 하셨다. 승규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상가건물이 강남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와이프도 동시통역사로 일하고 있었고 본인도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동창들 중 경제적으로 제일 여유가 있었지만, 한 번도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부암동, 성산동, 구기동의 강북지역의 빌라에서 전세를 살다가 2016년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내려갔다. 승규는 아이가 없어서 인지, 한 곳에 정착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아직도 이곳저곳에 머물며 지역을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승규가 하고 있는 노후에 대한 걱정은 다른 친구들과 사뭇 달랐다. 모두들 노후에 대한 대책으로 주택을 마련하는 거라고 했지만, 자신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함께 생각을 나눌 친구들이나 하고 싶은, 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고 했다. 승규도 서울의 미친 집값을 확인할 때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 어떻게 집을 구하나 막막하기도 하지만 미리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내년에는 와이프와 주택을 꼭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한 큰딸 남편은 승규의 여유가 몹시 부러웠다. 승규의 여유는 제주살이에서 오는 것인지... 서울살이에 지친 그는 하루라도 빨리 내 집을 마련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뿐이었다. 친한 동창들 중 집이 없는 건 자신 뿐이었다. 승규는 부모님이 주신 건물이 있지 않은가... 승규의 여유는 제주살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물려주신 강남의 상가건물에서 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장모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됐다. 2010년 장모님 말씀대로 강남의 낡은 아파트를 샀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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