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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미 Mar 06. 2024

자기 앞의 생_에밀 아자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 노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월이 가고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인데도 보통 노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기피하게 된다. 아프고 슬프고 쓸쓸할 것 같은 노년. 주인공 모모가 보는 노년은 그런 노년이다. 10살짜리 소년 모모(모하메드) 눈에 비치는 노인과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모모는 버려졌고 그런 그를 키워준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노년의 기준은 뭐지? 그렇다면 노년까지 살다가 죽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노후대비. 사실상 그런 게 가능할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노후대비는 아마도 현재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독서모임 질문 중 "이 책의 결말이 해피앤딩이었나요? 새드앤딩이었나요?"라는 질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멤버 중 한 분은 비뚤어진 사랑의 새드앤딩이라 느끼셨고 나머지 분들은 대체로 해피앤딩이라고 대답했다. 모모가 결국은 선하고 잘 사는 집에 입양을 가게 됐으니깐. 나는 중간에 붕 뜬 앤딩이라고 대답했다. 비주류, 가난한 사람들, 학대받은 사람들, 차별받은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끼리의 동질감으로 이루어진 사랑. 충분히 비뚤어진 사랑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족애라고 볼 수 없는 동질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현명한 모모는 결국은 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가 있을 자리는 그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모모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키워준 로자 아줌마와 자신은 똥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질퍽하고 냄새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존재. 그런 존재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키워온 관계는 사랑일까. 의리일까. 집착일까.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의 결말은 해피할 수도 새드할 수도 없다. 그들의 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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