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수행이 필요한 이유
인간은 몸, 마음, 영혼을 지니고 있다. 몸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감각이 느낀 것은 영혼의 눈으로 해석되어 감정과 관념(마음)이 만들어지고 이 경험은 몸에 새겨진다. 영혼의 눈이 맑은 어린 시절에는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느낀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문화 그리고 수많은 관계를 겪으면서 영혼의 눈에는 점점 이물질이 쌓인다. 그래서 내가 지각하고도 내 영혼이 해석하지 못한다. 진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헤아리기보다 쌓이고 쌓인 감정과 관념(마음)의 시선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상은 진실과 멀어지고 왜곡된다. 그렇게 진짜 나는 외면당한 채 상처받고 쪼그라든다. 세상은 고통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내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이물질을 걷어내야 한다. 나에게 쌓여 있는 감정과 관념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내야 한다. 관념들이 습관적으로 만들어 내던 감정은 진짜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귀 기울이고 존중해 주어 내 중심에서 당당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도록 자라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내 영혼을 자라게 할 수 있는가?
이는 신의 아들딸인 우리가 신성의 힘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 신성의 힘이란 기독교인들에게는 내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 혹은 예수이고, 불교인들에게는 참나나 진아일 것이다. 앞서 말한 영혼과 헷갈릴 수도 있지만, 영혼이 내면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라면 신성은 진리요 순리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본받고 따라야 할 예수의 사랑 충만한 삶이요, 불교인들에게는 무아가 되는 중도의 자비로운 태도다.
영혼을 자각하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다. 나아가 영혼을 바른 길로 안내해줄 신성을 발견하고, 신성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신의 경지로 생을 마무리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갈 것이요, 불교인들은 해탈할 것이다. 한데 천국이든 해탈이든 무엇이 중요한가. 신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만이 주어진 삶에서 오직 추구해야 할 것이요, 종교를 초월한 진리일 뿐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영혼을 자각할 수 있지만, 명상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다. 신성을 발견한 이후, 신성을 따르며 살아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간순간 관습에 젖은 인성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인성을 잠재우고 신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끈기 어린 수행만이 답이다. 몸과 마음의 욕망을 비우는 데 도움이 되는 자신만의 어떤 행위. 그리고 신성의 빛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인성 대신 신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이라는 도구를 올바르게 사용하겠다는 의지의 발현. 그러한 의지의 행위가 바로 수행이요,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삶의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