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오후 다섯시, 카톡이 울렸다. "있다 만나요~" 토요일에 아이의 축구대회가 있었으므로 평소보다 더 분주히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응?' 잠시 멍했다. 그리고 곧 과거의 내가 이번주 일요일 오후 일곱시에 어머님 두분과 안주가 맛있는 호프집에 가기로 했음을 떠올렸다. 출산 이후 저녁 약속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를 재우고도 혹시 중간에 깰까 두려워하며 밤 약속은 해봤지만 초저녁 약속이라니... 막연한 바램을 이루듯 약속을 했기에 현실감이 떨어졌나보다. 화들짝 놀라는 것도 잠시, 한시라도 빨리 놀고 싶어 숙제에 열심히 집중하는 아이를 봐주면서 저녁밥상을 준비했다. 순식간에 두시간이 흘러갔다. 평소 같으면 하세월이었을 숙제를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해버리고 집을 나섰다.
오후 일곱시의 집 앞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 좀전의 치열함은 갑자기 사라지고 봄기운을 머금은 공기가 아득했다. 산들산들 나뭇잎이 흩날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찾아온 평온함이 어딘지 낯설었다. 눈감고도 걸어다닐 것만 같은 길인데 시간대가 바뀌어서였는지 다른 장소에 온 것만 같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약 4년의 기간동안 동네를 오가며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었지만 이런 약속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이들 소리도 없고 엄마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일요일, 초저녁의 땅거미 속으로 엄마 셋은 사뿐사뿐 걸었다. 그리고 동네 맛집이라는 어느 주점의 창가자리에 마주 앉았다.
이야기의 물꼬는 단연 아이들의 공부 고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학원비에 쏟는 지출규모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위해 엄마는 라이딩과 뒷바라지는 당연하고 이제는 돈벌이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두분 중 한분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쯤 퇴근하는 일상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엄마 없는 집에 홀로 들어와서 간식을 챙겨먹고 학원으로 향하는 4학년 아이는 일을 시작한지 세달째인 지금도 여전히 엄마가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다정한 성격의 아이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하교 후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거나 엄마 품에 달려와 볼을 부비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일련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이에게 힘이 된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 역시 아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낸 어른이므로 아이의 미래를 고민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함을 안다. 그 선택이 비록 현재의 우리를 조금 힘들게 할지라도.
아이들이 갓난 아기였을 때 울고 보채는 젖먹이를 스스로 돌보기로 결정한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사회에서 다소 뒤처진 삶을 살게 될지라도 나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따뜻한 가정의 안주인이 된다는 생각에 설레이기도 했다. 이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면 약간의 돈은 모이겠지만 아이의 애착이 가족이 아닌 타인과 형성되는 일이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포기하는 대신 내 아이를 스스로 양육하는 기쁨을 누린 거였다. 모두 우리의 선택이었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우리의 선택이었다.
일을 시작한 어머님의 이야기는 여전히 아이 곁에 머물러있는 나를 돌아보게 했다. 과연 1년 후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이의 학원 라이드 시간을 피해서 잠깐씩 하는 파트타임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지인은 내 스케줄을 확인하며 이 정도 스케줄로 수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타강사'뿐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의 일순위는 오로지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이라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내 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퇴직한 첫 해, 남편은 생일 축하카드에 '우리 아이를 조금 더 잘 보살필 수 있어서 좋은 점도 많다'고 했다. 어딘지 엉성하고 살림에 서툴지만 아이를 향한 내 마음만은 누구보다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다보니 내 삶 역시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하나씩 채워져갔다. 그 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만 같았다. 쉴새없이 행복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 이면에 있었을지 모를 다른 생각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안그래도 미덥지 않은 나를 지우고 아이의 예쁘고 훌륭한 면을 가득 채워넣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동안 주인공이기 보다 그림자 같았던 나를 깨끗히 잊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걸까. 휴대폰 속 가득한 아이의 사진을 바라보며 나에게 묻는다. 만약 내가 승승장구했더라면 아이 곁에 머무는 선택을 했을까. 결혼은 했을까. 내 삶에 자신 없던 나를 지우고 아이를 통해 새로워진 나를 채워보려했던 건 아닐까.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직장의 네임밸류에 목숨을 걸었던 지난 날의 나. 아이를 낳고 이 사회에 자연스레 편입된 것처럼 느꼈던 나.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나...
어둡고 자신 없어하던 나를 돌아본다.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고 말해본다. 아직 인생을 몰랐고 의논할 상대도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알려준다. 아마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마음 속으로 이를 악물었을 거라고. 너만 그랬던 게 아니라고. 그러니 이제는 눈치보지 말고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어도 된다고 중얼거린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세찬 바람 앞에서도 조금 더 참고 기다려주는 여유를 잃지 않을 거라는, 결국에는 적응해 낼거라는 용기를 얻는 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가능한한 많이 찾아내어 맞춰봐야겠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변하는 세상 속에 존재할지도 모를, 조금은 달라진 내 자리를 찾아보기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