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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Jan 16. 2024

결혼식

내 결혼식은 나의 축제였다.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결혼이 늦어진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스물여덟 살 무렵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어느 가을날, 문득 나는 늦게 결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곧 현실이 되었을 뿐이다. (내 기준에서) 나보다 덜 노력하며 살아간다고 여기던 누군가도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해 보이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며 나만 왜 이렇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지독한 질투와 슬픔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만 반드시 해야 하는 무엇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며 조금씩 뒤처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며 내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당시에 읽었던 책들이나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결혼한 다음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덕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숙제를 얻기도 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직장생활이 내 삶이 되어가고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연습이 익숙해질 무렵 명료한 눈빛의 남편을 만났던 것 같다. 우리는 둘 다 직장이 삶이 된 회사원들이었다. 



책이나 매체는 당시 회사원들을 회색빛으로 묘사하곤 했다. 

다양한 색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예쁜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색깔로 섞여버리는 곳이 회사의 이미지였으니까. 비슷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홀로 왕따를 당하는 곳, 조금이라도 다른 기미가 보이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 기민하게 계산하고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회사였다. 

누군가가 잘되면 앞에서는 칭찬하고 손뼉 쳐주지만 돌아서면 그로 인한 파급효과가 무엇일지 가장 빨리 눈치채고 주변에 알리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돋보이곤 했다. 라인을 타는 것은 보통 그런 사람들의 몫이었기에 나머지 사람들은 튀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생각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빴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안에서 나 역시 점점 나만의 개성을 잃어갔다. 개성이라는 건 드러내는 만큼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로 보였다. 



성실한 무기징역수... 

드라마 아저씨에서 나왔던 말이다. 

당시의 나는 어쩌면 무기징역수의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발버둥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영업을 하셨던 부모님은 불규칙한 소득 대신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훨씬 내 삶에 도움이 되리라 여기셨고 당시의 어려운 형편에 자식인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지가 그곳이었으니...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차츰 나는 나를 잊어갔고 타인의 선택 뒤로 나의 색을 숨겼다. 조금씩 그들과 닮아갔으며 결혼식을 준비할 무렵엔 바쁜 회사생활이 내 결혼식보다 중요한 일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 대신 홀로 결혼식 계약을 준비하던 어느 점심시간, 축가 관련 비용이 십만 원 발생한다는 식장의 연락에 '불필요'하다고 대답하던 순간이 생생하다. 사람들은 타인의 좋은 면을 눈여겨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저 시기할 뿐이라는 생각을 했던 그때... 아마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을 나는 음악이 필요 없다는 대답을 얼른 먹어치워야 할 밥상 앞에서 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말에 담당자는 '무료로' 가능한 연주를 해드리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있었던 결혼식의 축가는 세 분의 연주자가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대학시절 좋아했던 음악이었다. 무료였지만 그 음악은 뇌리에 남았다. 너무 단출해서 미안해하시던 연주자 분들의 몸짓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나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소중히 여기는 법을 잊어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세상이 나를 주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채색이 되어감을 몰랐다. 그저 주목받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거나 내 마음속을 모르는 사람에게 괜찮은 척을 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외로워져만 가는 마음을 달래는 법을 찾는 일이 힘겹기만 했다. 온몸에 힘을 빼고 내 삶을 타자의 것인 양 관조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삶은 여전히 나의 것이었다.

문득 사람들이 부동산이 폭등할 때 한 뼘의 땅이라도 자신의 것이기를 소망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소유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그때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내 삶을 돌아보고 깨끗이 정리해서 타인이 아닌 내가 봤을 때 자랑스러운 모양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조금만 더 적극적이고 주눅 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우리의 결혼식은 그런 나를 닮아 간소했고 현실적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무난하도록, 누구도 내 결혼식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나는 그렇게 했다.

뒤에서 들려올 어떤 수군거림 앞에서도 현실적인 선택을 했기에 뱃속이 편안하도록 결혼식을 준비했다. 

크리스천이기에 목사님을 주례자로 모셨던 것만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평범'의 굴레를 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결혼식은 순탄하게 흘러갔던 것 같다. 하객들은 평범한 결혼식에 잠시 들렀다가 식사를 즐겼고 시어머니와 친정엄마는 눈물을 훔치셨다.  

마지막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까지 나는 철저하게 홀로 많은 결정사항을 정하고 비용을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를 길러주었던 부모를 떠나 가정을 꾸렸다. 

모든 것을 순탄하게 마쳤다는 것에 스스로 칭찬할 여유도 없이 이번엔 아이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흐르지 않는 듯 차분히 흐르는데 내 머릿속의 삶의 경로는 누가 쫓아올까 겁이난 누군가처럼 빠르게만 나를 몰아갔다. 조금 더 여유를 부려도 되는데... 마음속으로 생각은 했지만 그 여유를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여유를 부렸다가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더 빨랐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아기천사가 금세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아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구에 열중하는 아이를 양육하며 나에 대한 자존감을 다시 세우는 법을 배워갔다. 아이는 우리에게, 특별히 나에게 크나큰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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