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는 나누기 어려운 ‘엄마’의 무게
결혼할 사람은 한눈에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은 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거야.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다. 웃는 모습이 해맑은 사람이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람과 결혼까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연애는 오래 할 수 있겠다고. 확신은 실제가 되었다. 어느 해 식목일에 처음 만난 우리는 4년 뒤 같은 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언제나 푸르른 나무처럼 싱그럽게 살아가리라고 약속했다.
오랜 기간 연애한 만큼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 동안은 많이도 싸웠다.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고 일주일 간 대화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결혼은 연애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나와 결혼은 연애와는 다르다고 보는 남편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는 결혼 2년 차가 되면서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상대방을 향한 기울기가 약간 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은, 연애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것이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난 우리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양말 (뒤집어) 벗기, 치약 (중간부터) 짜기, 음식물쓰레기 (안) 버리기 같은 신혼부부의 흔한 문젯거리는 처음부터 해당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원래 나보다 더 깔끔했다. 설거지, 청소, 빨래 같은 집안일도 자연스럽게 나눠서 할 수 있었다. 남편은 대학생 때부터 자취를 했다. 양가 방문하기, 안부 전화하기, 가족 기념일 챙기기 같은 공동의 숙제는 최대한 서로를 배려했다. 남편은 천성이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간극이었다. 매사에 꼼꼼하고 신중한 남편은 나의 덜렁거리고 허술한 면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대로 나는 그런 성격 탓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종종 여자와 남자가 바뀌었다는 말도 들었다. 보통은 남자가 덜렁대고 여자가 꼼꼼해서 다투게 되는데 우리 부부는 그 반대라고 말이다. 성격에 성별이 따로 있지 않으니 그건 지나친 일반화였지만 남편이 느슨해지면 어떤 모습일지 이따금 상상했다.
다름에서 오는 간극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메워졌다. 우리는 다시금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연애 때와는 또 다른 관계였다.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 (피하는 게 상책), 어떤 음식을 먹으면 잘 체하는지 (매실차 상시 준비), 어떤 농담을 하면 즐거워하는지 (급하게 말 돌려야 할 때 필요),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그냥 물어보고 구입) 등 이제는 별 것 아닌 것마저 척하면 척이었다. 임신을 하기 전까지는.
아기를 가졌다고 유세를 떠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이 더 안절부절못했다. 시험관 초기에는 착상에 좋다며 아보카도를 잔뜩 사 오는 바람에 입덧이 오기 전부터 속이 느끼했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으나 안전제일을 외치는 누구 덕분에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많은 것에 제약이 있는 임신부는 더더욱 발목이 잡혔다. 여행 대신 선택했던 전시와 공연은 모두 취소했고, 또는 취소됐다. 가족들도 볼 수 없었다. 배가 불러올수록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전화로 안부를 대신할 뿐이었다. 한 번은 기립성저기압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막달에 가까워질수록 팔 저림과 소양증이 심해졌다. 초음파로 아기의 얼굴을 보고 오는 날이면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여러 증상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늦은 밤 손끝에서 시작된 저릿함은 새벽 사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때로는 팔을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날은 몇 달 동안 못 본 엄마, 더 오래 못 뵌 엄마의 엄마가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팔이 저리다는 우리 엄마는 지금 엄마의 나이보다 더 젊었을 때부터 팔다리가 저리다고 말씀하셨던 우리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어릴 적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던 내 손 역시 저린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다시 내 것이 될 게 뻔한 지루한 아픔.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지겨운 고통.
그러든지 말든지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꽤나 얄미웠다. 엄마의 남편도, 할머니의 남편도 왠지 그랬을 것만 같았다. 세심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한 사람인데 아픈 아내를 옆에 두고 어떻게 잘 자는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임신의 모든 과정이 그랬다. 여자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급격한 몸의 변화, 불안한 마음, 출산에 대한 두려움, 육아의 부담감, 경력 단절, 좁아지는 인간관계... 끝나지 않는 고민과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여자만 이렇게 힘든 거지?
엄마가 나를 낳던 시기보다는 낫고, 할머니가 엄마를 낳던 시기보다는 더더욱 나은 상황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이 무게를 허리와 엉치와 발바닥으로 분배할 수는 있어도 ‘아빠’와는 나누기가 어려웠다. 성별의 신체적 차이는 성격과는 달랐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만 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부부일 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고, 아무리 역지사지를 해봐도 대대로 내려온 손저림 같은 괴로움은 모를 거라고, 엄마와는 또 다른 아빠의 무게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 또한 이런저런 걱정거리에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고. 잠잘 때 제일 느슨해지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별 것 아닌 것마저 척하면 척이던 우리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중간 지점에서 만난 기울기가 이제는 약간 더 내 쪽으로 향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저녁 방송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저린 손을 주물러달라고 부탁하고,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은 아빠 담당이 될 거라고 일러줘야지. 하나씩 목록을 정해서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할 숙제들을 직접 건네주기로 했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특별한 일에 있어 엄마는 엄마로서, 아빠는 아빠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별 것들이 척하면 척인 우리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