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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27. 2023

스페인어를 배우는 이유

신과 함께하는 불규칙 인생.

학원이나 과외 혹은 학습지 같은 것들을 좋아했던 분 계신가요?라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나는 저 질문에 번쩍 손을 들만한 아이였다. 남들은 가기 싫어하는 학원을 너무 좋아했다. 학원을 좋아하는 꼬맹이라니. 공부에 환장을 했나 보군! 작가 당신은 공부를 좋아했는가? 그건 또 아니다. 학원이라는 공간은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장소이다. 그래서 좋아했다. 친구들끼리 학원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가지고 시시덕거리면 그게 그렇게 부럽고 질투가 났다. 나만 학원에 가지 않아서 저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구나. 서러워 뿌엥. 엄마를 조르고 졸라서 학원에 다니곤 했었다. 우리 집은 학원이나 학습지 같은 사교육을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엄마한테 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 나는 이렇게나 힘들게 다니는 학원인데 너희들은 학원 가기 싫다고, 학습지 하기 싫다고 징징 거리기나 하니! 세상 정말 불공평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된 지금은 뭐든 관심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게 있으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가면서 뭐든 찍어서 맛은 봐본다.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다 배워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별별 것들을 많이도 찍어보았다. 영상편집, 힙합비트 메이킹, 타로, 뮤직비디오 촬영기법, 작사, 시나리오 작법 등등 별의별 잡기들이 아주 조금씩은 있다. 싫증이 빠른 편이라 오래 하지 못한 것이 문제 이긴 하지만. 아무튼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그나마 꾸준하게 하는 것이 있다. 스페인어이다. 시작은 여행이었다.


한 달간의 유럽여행 중에 포르투갈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나 빼고 모두가 백인이었다. 영어도 안 되지, 스페인어도 안 되지 혼자만 아시아인이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눈길은 한 번쯤 줄텐데. 인생에서 가장 얼굴이 화끈거리고 외로운 날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영어공부를 잠깐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어공부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책을 덮어버렸다. 여러 분야의 찍먹 전문가이다 보니 아닌 것 같을 때는 빠르게 손절해 버리는 판단력이 있다. 


여행 당시 만났던 언니가 있었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몇 번이나 완주한 살면서 본 적이 없는 도전자였다. 그 언니가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간단한 스페인어 회화가 가능했는데 나에게 스페인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언어라고 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고 있다는데 한번 배워보아라, 배우면 정말 금방 잘할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못 먹어도 고! 일단 발은 담가본다. 그렇게 스페인어를 찍먹 해본다.


일단은 서점에서 왕초보, 왕기초 등의 타이틀이 달린 책 하나를 샀다. 교재에 붙어 있는 동영상 강의와 함께 대충 기초는 어찌어찌한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지구력이 그리 길지 못했다. 재미는 있는데 귀찮았다. 마음 한편에 재미있는 언어라는 생각을 담아둔 채 어플로 깔짝거리면서 공부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하긴 했다. 여기에 의미를 둔다.


그러다 올여름 좋은 기회가 있어서 오프라인 스페인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은 중년의 남성분이었는데 스페인에서 거진 10년을 공부하신 분이었다. 언어보다도 그들의 문화, 사상, 가치관 같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두 시간의 강의가 지루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언어에는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어. 우리나라 말은 '우리'가 중심이잖아. 근데 영어는 '내'가 중심이야. 그래서 I는 문장의 중간에 와도 대문자지. 근데 스페인어는 '신'이 중심이야. 걔네는 가톨릭 이잖아. 나는 그래서 스페인어가 좋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무것도 없어. 우리의 몸, 정신 무엇 하나 스스로 만들어 낸 게 없잖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이었다. 언어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심연까지 관철하고 있다니. '배가 고프다'라는 단순한 문장을 스페인어로 직역하자면 '나는 배고픔을 가지고 있다.'로 해석이 된다. 왜 이걸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거지? 스페인어를 배우면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가려웠던 부분이 속 시원하게 긁혔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신이 준 것이니 신이 알아서 해줄 거라는 한량(?) 마인드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에스타에 그냥 낮잠 자가면서 다들 일에 그렇게까지 목을 매지 않는단다. 스페인의 실업률이 살벌하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어에는 불규칙동사가 많다. 정말 징하게 많다. 불규칙동사를 배우다 탈주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나 역시 탈주각을 세우고 있을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불규칙은 왜 불규칙인지 아니? 불규칙 동사는 자주 쓰고, 중요하니까 따로 불규칙으로 빼둔 거야. 우리 인생도 한번뿐이고 중요하니 불규칙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해."


크으- 얼마나 깊은 통찰이 있는 말씀이냐는 말이다. 이제 고작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이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불규칙적인 변수들이 있었는가. 오른쪽으로 가나 싶었는데 가다 보니 왼쪽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수상하리만큼 내 뜻대로 풀리는 것이 잘 없었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그 모든 일들이 결국엔 0.1걸음 정도 성장을 한 나를 만들어주긴 했다. 물론 다시 겪고 싶지는 않지만. 내 인생의 불규칙들이 불쑥불쑥 나타난 건 그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그냥 그렇게 위안을 삼아버렸다. 별안간 공부하다 말고 인생을 배운 사람이 됐다.


두 달간의 수업이 끝났다. 다른 것들보다도 선생님의 다양한 썰을 듣는 재미가 쏠쏠한 수업이었는데 그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수업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어플로 계속 깔짝거리면서 손을 놓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이젠 습관이 되어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지 않고 잠드는 날엔 굉장히 찜찜하다. 대단하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걸음마 정도이다. 하도 기초만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간단한 여행회화 정도 가능한 수준에 그치지만. 큰 발전은 없다. 하하하! 여전히 불규칙동사 고단하고 끝이 안 보인다. 그래도 생각을 해본다. 이 또한 신이 나에게 준 불규칙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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